[人터뷰+] "25년간 국어사전만 읽었죠"..그가 찾은 해법은?

임태우 기자 2016. 7. 3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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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시대, 종이책으로 된 국어사전이 나오기 어렵다는 출판 시장에 당당하게(?) 종이책 국어사전을 내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혼자 힘으로 25년 동안 기획하고, 자료 조사하고 원고를 썼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생기면 인터넷으로 금세 검색해서 찾는 디지털 시대에, 낡고 뒤떨어져 보이는 종이책 국어사전을 편찬한 것이죠. 그는 왜 한 권의 국어사전을 펴내려고 인생을 바쳤을까요?

우직해 보이는 그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존의 국어사전을 빠짐없이 정독했습니다. 그러던 중 문제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같이 뜻풀이가 어렵다는 것이었죠. 무엇보다 고질적으로 ‘돌림풀이(순환정의)’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가령 ‘성가시다’의 뜻을 찾기 위해 국어사전을 펼쳐보면, ‘성가시다 : 자주 들볶거나 번거롭게 굴어 괴롭고 귀찮다’고 나와있죠. 그렇다면 ‘귀찮다’의 뜻풀이는 어떨까요? ‘귀찮다 : 마음에 들지 아니하고 괴롭거나 성가시다’고 돼있죠. 심지어 ‘번거롭다’의 뜻은 ‘귀찮고 짜증스럽다’라고 풀이돼있습니다. 이렇듯 기존 국어사전에는 각 낱말들의 뜻풀이가 돌림말을 하듯 맞물려 있습니다. 각 낱말의 뜻을 정확히 살펴보기 어려운 것이죠.

기존 사전에서 안타까운 대목은 더 있었습니다. 사전을 펼쳤을 때 '뜻이 같은 한자말'을 올림말로 삼아 한자말이 먼저 나오고, 쉽게 쓸 한국말은 뒤에 나오는 관행이 빈번하다는 것이었죠.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고 완성해 낸 사전이 바로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입니다. SBS 취재진은 매일 쓰는 말의 어원을 찾고, 뜻을 정리해 사전으로 만든 저자 최종규 씨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봤습니다. <편집자 주>

▷기자: 기존 국어사전의 고질병인 ‘순환정의’를 피하려고 하셨다고요?

▶최종규 씨:
네, 국어사전을 엮으면서 순환정의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했죠.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 제목처럼 ‘비슷한말 꾸러미’부터 제대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비슷한 말이 어떻게, 왜 비슷하면서도 다른가를 알아야 하죠. 또 비슷한 말 꾸러미 가운데 어린이도 쉽게 알아듣고 헤아릴 수 있는 ‘바탕말(기본 낱말)’을 가려내고 뽑아야 하죠. 이를 통해야만 사전 한 권을 오롯이 엮을 수가 있죠.

▷기자: 개념이 생소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렵네요. 먼저 ‘바탕말’이란 게 대체 뭐죠?

▶최종규 씨:
국어사전을 엮을 때 낱말 뜻을 쉽게 푸는 풀이말을 ‘바탕말’이라고 하죠. 더는 풀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쉬운 말이기도 해요. 이런 바탕말로 풀이해야 큰 사전을 엮을 수 있어요. 100만 가지 낱말 뜻이 담긴 사전이라 치면 적어도 5백 가지의 바탕말로써 뜻풀이를 해야죠. 그 5백 가지 바탕말은 굳이 사전에서 찾지 않고도 어렴풋이, 혹은 웬만큼 잘 아는 단어란 말이에요. 이런 바탕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뜻풀이에 나서면, 뜻이 돌고 도는 돌림풀이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기자: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에서 바탕말은 어떻게 가려내죠? 기준이 있다면요.

▶최종규 씨:
아무래도 기준은 어린이죠. 어린이가 흔히 쓰는 말들, 어린이에게 우리 어른들이 가르쳐주면 바로 쉽게 배워서 그때그때 쓸 수 있는 말을 바탕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외국 사람이 한국말을 배울 때 기본적으로 익혀야 하는 말이기도 하죠. 가령 ‘먹다’나 ‘마시다’도 바탕말이 될 수 있죠. ‘먹다’, ‘마시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기자: 우리가 그런 바탕말을 제대로 찾고 이해하는 게 중요한가요?

▶최종규 씨:
그럼요. 예전에 컴퓨터를 ‘셈틀’이라고 지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때 사람들은 셈틀이라는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지도 않고, 컴퓨터가 단순히 숫자를 세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거냐고 비판했죠. 하지만, 사전에서 ‘셈’이라는 낱말, ‘세다’라는 낱말을 찾아봤다면 그런 비판을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세다’라는 말은 ‘생각하다’는 말과 어원이 같거든요. 숫자를 센다는 것은 나중에 뜻이 갈린 거죠. 처음에는 ‘헤아리다’와 같이 생각하는 일을 나타내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셈틀이라는 말은 생각하는 기계라는 말이 돼요. 뜻을 살펴보면 아주 잘 지은 말인데, 사전을 찾아보지 않은 채 이름을 엉터리로 지었느냐고 비판하는 게 우리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 이 책에서 다룬 바탕말 개수는 어느 정도죠?

▶최종규 씨:
사전에서 1,100가지 낱말을 다뤘고요. 그 중에서 바탕말은 300개쯤이 되지 않을까 해요. 지금 이 책을 한 권 냈지만, 앞으로 두 권쯤은 더 써야지 큰 사전을 쓰는 바탕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기자: 스스로 가려낸 바탕말로 사전을 엮었다는 점이 참 특별하군요. 또, 이 사전은 백과사전 식의 기존 국어사전과 구성 방식이 매우 다르더군요. 비슷한말을 묶어서 설명한 점이 눈길을 끌었어요. 왜 그렇게 하신 거죠?

▶최종규 씨:
네, 비슷한말을 264갈래로 묶어서 다뤘어요. 모든 말에는 비슷하게 어울리는 말이나 맞서는 뜻으로 쓰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말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사용하죠. 가령 ‘이따금’, ‘가끔’, ‘더러’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보라면 바로 떠올리기 쉽지 않죠. 이런 상태에서 낱말을 막 쓰다 보면 우리 마음도 마구잡이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비슷한 말의 정확한 쓰임새를 알려주고 싶었어요. 사전을 보면서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이 어떻게 담기는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이따금: 조금 있다가 또 조금 있다가. 자주 되풀이하지는 않으나 자꾸
가끔: 얼마쯤 뜸을 들이면서 되풀이를 하는데 드물게
더러: 잦거나 드물지는 않으면서 생각날 때
(모둠풀이 붙임)
‘이따금’은 되풀이를 하기는 하는데 썩 자주 되풀이하지는 않을 때를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너무 뜸을 들이면서 드물지는 않은 모습을 가리켜요. 꾸준하기는 하지만 자주 있지도 않고 드물지도 않은 그저 그런만큼을 가리킬 때에 씁니다. ‘가끔’이나 ‘더러’도 드물게 일어나는 어떤 일을 가리키면서 씁니다. ‘이따금’은 드물면서도 자꾸 일어나는 일을 가리킨다고 할 만하며, ‘가끔’은 되풀이를 하지만 드물 적에 쓴다고 할 만합니다.

▷기자: 사전을 만드는 과정이 쉽진 않았을 것 같아요.

▶최종규 씨:
25년이나 걸렸어요. 사전을 기획하는 것만 20년, 쓰는 것만 5년이었고요. 이 시간 동안 시중에 나온 모든 사전을 읽었어요. 혼자서 모든 대학의 국어국문과 교재를 샅샅이 찾아 다 읽었죠. 절판된 책들도 헌책방에서 찾아 읽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낱말이 언제부터 어떻게 쓰였을까 생각했죠. 이를테면 ‘밥’이라는 낱말의 어원은 어느 사전에도 쓰이지 않았어요. 이게 몇만 년 된 말인지, 몇억 년 된 말인지 모르죠. 그래서 시골에서 살면서 직접 살림을 해보면서 낱말의 어원을 생각해봤죠. ‘옛날엔 이런 상황에서 쓰였겠구나’라고 마음으로 느꼈죠. 그렇다고 마음으로 느낀 걸 함부로 사전에 쓸 수 없잖아요?다시 사전과 책, 그동안 모아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낱말의 말풀이를 했죠.

▷기자: 요즘 종이책 시장이 가뜩이나 어렵다고 하죠. 그런데도 이런 사전을 공들여 만드신 이유는 무엇이죠?

▶최종규 씨:
고등학생 때 국어사전을 통독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어요. 당시 국어 선생님도 저에게 국어사전을 빌릴 만큼 저만 국어사전을 갖고 다녔죠. 문득 ‘왜 사람들은 국어사전을 안 읽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읽기 시작했죠. 처음 읽는데 석 달, 그다음엔 한 달 걸려서 읽었어요. 국어사전엔 한자말, 일본말이 너무 많았어요. 또 외국사람 이름, 외국도시 이름이나 심지어 외국 문학책 이름도 잔뜩 실려 있었죠. 무엇보다도 한국말 풀이가 너무 엉성하고 국어사전인데 한국말을 배우기 어렵다는 느낌이 강했죠. 그래서 차라리 내가 국어사전을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책의 맺음말에는 ‘우리는 생각을 밝히고 가꾸고 키우고 사랑하고 나누고 북돋우고 살찌우려고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정확한 띄어쓰기, 맞춤법, 어려운 말들을 쓰는 것이 겉으론 멋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뜻을 모르고 사용하는 그 말들에서 마음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을까요? 커피 한잔과 함께 우리가 흔히 쓰는 말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임태우 기자eigh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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