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초급수업에 유학파가..대학가 '양민학살' 수강

연규욱 2016. 7. 2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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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억울하다 교수님에 내 노력을 인전해주실 것이라 믿었는데...'태생적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다"

오는 8월 서울의 한 명문대를 졸업할 예정인 박모(27)씨는 며칠 전 '영어회화' 교양과목 성적을 확인하고는 큰 좌절감을 느꼈다. 취업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평점을 끌어올리기 위해 남들보다 발표도 더 많이 하며 교수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했으나 유학파 학생들한테 밀려 'B'학점을 받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박씨는 "사실 강의 첫 시간부터 불안하긴 했다"며 "중급자들을 위한 강의였는데 학생들이 원어민 수준의 발음과 문장력으로 자기소개를 하더라"고 말했다. 박씨는 당시 수강생 33명 중 10명 이상은 원어민 수준의 영어실력을 가진 학생이었다고 밝혔다. 옆자리에 앉은 학생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었다. 박씨는 "왜 고급반이 아닌 이 중급반 수업을 듣냐고 물었더니 '전공과목에서 깎아먹은 평점을 만회하기 위해 수강신청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교수보다 영어가 유창해 보이는 학생도 몇몇 있었다"고 덧붙였다.

취업난 속 대학생들의 학점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기 실력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의 외국어 교양수업을 수강하는 '꼼수'가 학생들 사이에서 보편화되고 있다. 이들은 '학점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쉽게 고학점을 딸 수 있는 이른바 '꿀강의'를 찾는 것이다.

수년간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초급중국어 강의를 한 이경진 연세대 공자아카데미 교수는 "요즘 초급반의 경우에는 학점을 잘 받기 위해 들어온 학생과 중국어를 정말로 배우고 싶어서 들어온 학생 두 부류로 나뉜다"며 "예전에는 수강행 30명 중 한 두명이 중국어 능통자였으나 2년 여전부터 그 수가 2~4배로 '확' 늘어났다"고 말했다.

'꿀강의'를 찾아 벌떼처럼 모여드는 장기 외국거주자나 외국인들은 비단 이 학교 뿐만 아니다. 이같이 외국어 '네이티브'(원어민) 수준의 수강자들로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는 학생들사이엔 '양민학살'이라는 말이 유행어로 등장했을 정도다.

최근 고려대학교에서 초급중국어 과목을 수강한 서모(25)씨는 "원래 제2외국어 교양과목은 양민학살 당하는 경우가 많다"며 "교수님이 첫 수업시간에 잘하는 학생들은 중급이나 고급을 들으라고 권유하셨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남은 학생들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문제는 이런 외국어 능통자들의 초급강의 수강을 막을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것.

보통 교수들은 강의계획서를 통해 해당 언어권에서 살다오거나 관련 언어 자격증을 보유한 학생은 수업을 듣지 말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거짓말로 잡아떼면 달리 방법이 없다. 학칙으로 막고 있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 서울소재 주요 대학에서 영어토론 과목을 강의한 한 문과대학 강사는 "문제제기는 늘 있어왔다"면서도 "레벨테스트를 해서 수강자격을 제한하면 좋겠지만 별도의 비용이 발생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서울대학교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지난 2014년 봄학기부터 제2외국어 관련 모든 강좌에 대해 수강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기 시작했다. 해당 외국어를 수능시험에서 응시했거나,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해당 제2외국어를 전공한 학생, 혹은 해당 외국어권에 외국인 자격으로 입학한 학생은 제2외국어 초급 수업의 수강신청이 제한된다. 유재준 서울대학교 기초교육부원장은 "제한이 없었을 때, (외국어 우수자가) 초급반을 수강한 케이스가 있었다"며 "수강 자격을 제한하는 게 당연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해 서울대학교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수강제한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문의하는 글에는 회의적인 댓글이 주를 이뤘다. 이중 한 학생은 "일본어 (초급)수업에 들어가면 원어민들 잔치다. (나도 일본어를 좀 알지만) 못하는 척 하느라 고생 중이다"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연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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