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혁의 아장아장정치부] '개돼지'를 만나다..나향욱 국회 습격사건

고승혁 기자 2016. 7. 25.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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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카메라 기자들이 국회의사당 5층에서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을 기다리고 있다. 고승혁 기자.

까치발을 들고 카메라 기자 어깨너머로 긴 통로를 바라보았다. 텅 빈 복도.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복도만큼이나 이름이 긴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교문위) 회의실은 5층이었다. 좁은 통로 좌우로 방송용 ENG 카메라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자 힐끔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그가 오기로 한 오후 4시 10분. '민중은 개돼지' 발언으로 일약 유명인 반열에 오른 교육부 나향욱 전 정책기회관은 11일 국회에 출석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교문위 회의실에 입장하는 순간까지, 핫 셀럽(Hot celebrity)의 동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카메라 기자들은 집요하게 복도 저편을 바라보았다. 로비에 깔린 하얀 타일이 반들반들 빛났다. 아직 그는 오지 않았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나 전 기획관 관련 기사가 잡혀있지 않았지만 그의 실물을 확인하고 싶어 국회 본청 5층까지 올라갔다. 상임위 회의는 기자실 모니터에 실시간 중계되기 때문에 직접 회의실에 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교문위 앞 복도에는 이미 장이 섰다. 굳이 올 필요 없는 취재기자들도 팔짱을 낀 채 나 전 기획관을 보겠다며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막이 오르기 직전의 객석처럼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자들은 때때로 손목을 쳐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예정된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다. 한껏 예민해진 카메라 기자들 사이로 나 전 기획관이 안 오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번질 때 쯤. "뒤! 뒤로 왔다. 뒤!" 우악스러운 외침이 폭발했다. 적군이 급습한 전장의 병사처럼, 카메라 기자들이 일제히 장비를 들고 몸을 틀어 나 전 기획관을 향해 플래시를 터트렸다.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로 얼빠진 듯 텅 빈 표정이 있었다. 얼굴이 심하게 번들거렸다. 갈 곳 잃은 눈동자 두 개에는 초점이 없었다. 나는 신도림역 출근길 마냥 난판이 벌어진 인파 속에서 가까스로 몸을 빼냈다.

지난 11일 나 전 기획관이 기자들을 피해 국회 교문위 회의실에 입장하고 있다. 고승혁 기자


지난 11일 나 전 기획관이 기자들을 피해 국회 교문위 회의실에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

"우리 사람 되기는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2002)'에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던 대사가 떠올랐다. 예술가의 조상이 신내림을 빙자해 춤 추고 노래하며 피로 악몽을 점쳤던 무당이라는 사실에 비춰보면, 홍 감독의 제언은 하나의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테바이의 무녀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에게 비극을 경고했듯 홍 감독은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사람과 괴물은 달라야 한다며 계고장을 날렸다. "여러분 부자되세요"라는 노골적인 신용카드 광고가 흥행하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더이상 속물적 욕망을 대중 앞에 내놓으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덮어놓고 돈을 밝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2014년에는 깨우친 '현대인'이 '미개한 국민'을 지적한 바 있다. 페이스북.

결국 교육부 공무원이 부끄러움 한 점 없이 '민중은 개돼지'라고 기자에게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징후는 많았다. 재벌가(家) 정몽준 전 의원의 아들이 "국민이 미개하다"며 SNS에 글을 올린 것이 재작년이었다. 사람이라면 설령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사회적 위상'과 '체면'을 생각해서 숨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가면(persóna)'을 쓸 줄 알기에, 구스타프 융은 사회적 행동규범을 수행하는 인간의 외적 자아를 '페르소나(persona)'라고 분석했다. 가령 동물은 배가 아프면 누가 보든 말든 아무 데서나 똥을 싸지만 인간은 욕구를 숨긴 채 화장실을 찾아간다. 개는 발정이 나면 아무 곳에서나 교미를 하지만 사람은 성욕이 일어난다고 아무나 붙잡고 성폭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타자의 시선을 의식해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통제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이준식 교육부장관이 11일 국회 교문위가 나 전 기획관 출석 여부를 두고 정회하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아랫사람을 잘 둬야 한다. 뉴시스.

나 전 기획관이 나와 당신을 향해 개돼지라고 말했을 때 깨진 것은 고작 공무원에 대한 신뢰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인간성 자체를 분쇄했다.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욕망에만 천착하는 극도의 동물적 이기주의를 전면화 한 것이다. 사실 국민을 미개한 개돼지로 생각하는 엘리트주의자는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널려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지배층도 내밀한 사념을 SNS나 종합일간지 기자를 향해 게걸스럽게 배설하지 않았다.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국민을 실제 짐승처럼 사육한 전두환 전 대통령도 입으로는 '정의사회구현'을 외쳤다. 조선과 중국을 피로 물들인 히로히토 천왕도 '대동아공영권'이란 명분을 내걸었다.

나 전 기획관은 역사 속 수많은 악당들이 감히 뛰어넘지 못한 윤리의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렸다. 개와 고양이도 밥 주는 주인을 물지 않는다는데 2년 사이 재벌집 자제와 공무원이 밥 주는 소비자와 납세자를 할퀴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1%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라고 강변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 어느새 괴물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했다가는 엄마한테 혼나는 시대가 왔다. 한국역사인물시리즈.

초등학생 시절, 옆집 아주머니에게 로봇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싶어서 부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어린 애가 벌써부터 돈을 밝히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최영 장군이 말했단다"라고 혼을 냈다. 얼마 전 초등학교 앞 카페에서 글을 쓰는데 한 아이가 혼나고 있었다. "너 이렇게 공부 안 하면 돈 많이 못 벌어. 나중에 의사 변호사 돼서 돈 많이 벌어야지" 아이는 노트에 긁적긁적 낙서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돈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최소한의 윤리를 가장하기 위해 가면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적 규범과 도덕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씹선비'라고 비하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윤리는 없는 윤리다. 대낮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발정 난 개가 교미하듯, 돈과 권력을 달라며 헉헉대는 사람들이 세계 전면에 부상했다. ​홍 감독이 새 천년의 들머리에 붙여놨던 경고는 무시당했다. 괴물이 된 지배층은 가감없이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테바이 무녀의 신탁이 차츰 이뤄지고 있었다.

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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