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성폭행범입니다".. 대학가에 실명 '사과 대자보' 붙이는 이유

손호영 기자 2016. 7. 2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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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저지른 성폭행을 고백합니다.”

지난 9일 성균관대에 다니는 전모(24)씨가 페이스북에 글을 하나 올렸다. 자신이 저지른 성폭행 사실을 고백하고 공개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실명으로 낸 사과문에서 “작년 여름 만취 상태로 같은 학교 후배 집에 찾아가 성폭행했다”며 “피해자와 합의해 내용을 작성했고 피해자 요구에 따라 공개 게시한다. 모든 행위에 대해 시인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작년 10월 연세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홍모(21)씨는 한 달 전쯤 같은 후배가 잠든 사이 신체 접촉을 하고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실명 대자보를 교내에 약 보름간 붙였다. 홍씨는 대자보에서 “공개적인 사과문 게시로 피해자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을 약속한다”며 “피해 사실을 공론화해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리려는 피해자 의지가 가려지질 않길 바란다”고 적었다.

최근 대학가에선 성범죄 가해자의 실명 공개 사과가 늘고 있다.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이나 교내 대자보를 이용하고, 사과문 내용은 피해자와 미리 합의하는 식이다. 이처럼 성범죄 가해자들이 공개 사과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공개 사과를 하게 되면 재판에서 감형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성범죄 형사 재판에서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면 형량이 낮아질 수 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양현아 교수는 “성범죄의 경우 피고인이 죄를 뉘우치는지가 중요하다”며 “공개사과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뉘우친다’는 증거로 인정돼 양형 참작 사유가 될 수 있다. 공개사과를 전제로 피해자와 합의하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재판부에 내면 감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김혜정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012년 6월~2014년 6월까지 선고된 성범죄 관련 판결문을 연구한 결과, 감형 요인 중 ‘처벌 불원’이 42.2%,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는 19.1%였다.

과거 성범죄 피해자가 피해를 감추기 위해 처벌에 소극적이었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적극적으로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추세도 ‘공개 사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연세대 대자보 사건 때 피해자는 “가해자가 공개 사과문을 내라”는 입장을 여학생회 측에 밝히기도 했다. 연세대 성평등센터 최지나 연구원은 “경각심을 주기 위해 가해자들에게 대자보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생긴 것은 성폭력과 인권 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벌어진 ‘고대 카카오톡방 언어 성폭력 사건’에서도 피해 여학생 등이 대자보를 통해 이를 공론화했다. 가해 학생들도 자신의 전공과 반을 밝히며 ‘모두 인정한다’는 사과문을 붙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피해자들은 본인의 복수심이나 억울함보다는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반면 실명 공개 사과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서울대 인권센터 이경희 연구위원은 “과거엔 성폭력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피해자 구제와 공동체 회복을 위해 공개 사과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며 “가해자가 어느 범위까지 공개사과를 하는 게 적절한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3년 서울의 한 대학에서 실명 공개 대자보를 요구받은 성희롱 가해자가 이에 반발해 소송을 냈는데, 법원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원고 승소 판결했다.

공개 사과가 재판에서 감형받거나 학교 징계를 피하는 수단이 되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경 소장은 “가해자들이 공개 대자보 외에도 감형을 위해 성폭력상담소나 여성단체에 기부금을 내고 영수증을 떼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며 “피해자의 분노와 인권을 먼저 생각하고 진심을 담은 사과를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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