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나이·직업 모르는게 속 편해.. 사람에 지친 사람들 모여라

유소연 기자 2016. 7.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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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활동만 하고 헤어지거나 익명 채팅 나누는 '느슨한 모임'

지난 28일 오후 8시 서울 강남의 카페 '북티크'에 20~30대 남녀 여섯 명이 모였다. 글쓰기 모임 '일상의 끄적임' 회원들이다. 이 모임엔 불문율(不文律)이 있다. 서로 나이나 직업, 사는 곳, 가족관계를 캐묻지 않는다는 것. 모임을 연 지 두 달이 되었지만 회원들이 각각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지, 어떤 학교·회사를 다니는지 정확히 모른다. 2주에 한 번 시간 되는 이들만 만나 자신이 써온 글을 읽어주고 2시간가량 자유로운 대화를 나눈다. 띠동갑 이상 나이 차이가 나도 반말은 금물. 나이에 상관없이 '○○님'이라고 존중해주는 게 이 모임에서 권장되는 매너다. 모임이 끝나고도 SNS 메신저로만 연락하는 이들은 서로 휴대폰 번호조차 제대로 모르고 지낸다고 했다.

가족보다 편한 '남'

이들이 그렇다고 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날 "나는 우울할 때 빨래를 돌려놓고 실컷 운다"는 고백부터 "부모님이 나이 들수록 날카로워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는 집안 얘기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이정우(여·30)씨는 이 모임 회원들에 대해 "나를 잘 모르면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력서에 들어가는 이름·나이·출신학교는 모르더라도 요즘 고민은 무엇인지, 최근에 어떤 책을 재밌게 봤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가장 잘 안다"고 말했다. 류기련(여·30)씨는 "한 주 동안 사람에게 시달린 마음을 이 모임에서 치유받고 간다"며 "여기에선 내가 어떻게 보일까 고민하며 생각을 검열할 필요가 없고 다른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하든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해준다"고 했다.

최근 20~30대 사이에서 이런 식으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만남이 흔해지고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회원들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는 모임이 서울에만 200개 가까이 올라온다. 이들은 지역·취향·취미 등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모이되 서로의 신상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모임 목적에 맞게 모여 서로 공감대를 형성한 뒤엔 '쿨하게' 헤어진다. 기존 동호회처럼 모임 후 우르르 뒤풀이를 가는 풍경도 보기 드물다. 회원 가입과 탈퇴의 경계도 모호하다. 어느 날 왔다가 발길이 뚝 끊겨도 "요즘 왜 안 나오느냐"고 독촉하는 사람도 없는 이른바 '느슨한 공동체'를 지향한다. "나 스스로 간섭받거나 나를 완전히 드러내는 게 싫으니 남에게도 굳이 요구하지 않겠다"는 요즘 2030세대 성향을 그대로 반영한 모임들이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복합문화공간 '공상온도'에선 영화 상영회가 열렸다.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지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십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참석비로 5000원 안팎의 음료 한 잔을 시키고 2시간여 동안 영화 '허(Her)'를 함께 봤다. 그중 일부는 상영이 끝나고 남아 서로 영화 얘기를 나눴다. 모임을 주최한 한승훈(33)씨는 "아무리 혼밥·혼술을 넘어 혼놀(혼자 놀기)까지 한다고 하지만 혼자에 적응했을 뿐이지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꺼리는 것은 아니다"며 "기존 인간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공감과 위로를 찾아 우리 모임에 온다"고 했다. 이 모임 사람들은 영화를 추천할 때도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제안하지 않고 "이 영화 재미있으니 꼭 보라"고 권유한다. 이 모임 이외의 별도 약속을 하지 않는다는 묵계 때문이다.

서울 북부지역 한 친목 모임에 나가는 교사 최모(31)씨는 "가족을 만날 때보다 이런 모임에 나올 때 받는 스트레스가 오히려 적다"고 말했다. "나를 착하게 포장할 필요가 없거든요. 잘 모르는 사람에게 오히려 내 부끄러운 부분을 내보이기 쉬운 면도 있어요. 친척 모임에서 예전에는 시험성적이 어떤지 사촌들과 비교했고, 지금은 결혼을 언제 하는지 성화예요. 가족인데도 반갑지가 않은 거죠. 그렇지만 이곳에선 누구도 나를 채근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아요." 최씨가 속한 모바일 단체채팅방엔 100명 넘는 회원이 있다. 모든 회원을 알진 못하지만 그때그때 시간 되고 맘 맞는 사람끼리 만난다. 누군가 "퇴근 후 맥주 한잔하자"거나 "주말에 같이 북한산 갈 사람을 모은다"는 제안을 하면 공지된 시간·장소에 맞춰 참석하는 식이다.

느슨한 공동체에서 '헬조선' 잊는다

며칠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내향적인 사람 모여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을 올린 이는 "사회에서 상하·갑을 관계에 충분히 지쳤으니 모임에선 눈치 보지 말자"며 "익명으로 고민을 나누고 서로 속을 털어놓는 과정 자체가 힐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첫 모임을 갖기도 전에 100명 가까운 사람이 가입 신청 버튼을 눌렀다. 모임에 참석할 예정이라는 김모(31)씨는 "평일에 거래처 사람에게서 '또 실수하면 나가 죽어라' 따위의 폭언을 듣다 보니 어느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졌다"며 "이 모임이 나를 위한 탈출구로 느껴졌다"고 했다.

"소속감을 강요하는 조직문화를 피하다 보니 오게 됐다"는 게 느슨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말이다. 서울 용산구에 사는 박모(28)씨는 주말마다 SNS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모여 밥을 먹는 '소셜다이닝 모임'에 나간다. 박씨는 "주말에 여자친구와 뭘 하고 놀았는지 묻는 회사 선배 때문에 월요일 출근이 두려울 정도"라며 "우울한 날 상사 앞에서 웃고 떠들며 비위를 맞추고 있는 내 모습에 가끔 비참함을 느낀다"고 했다. "소셜 모임에서는 감정노동할 필요도 없고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새로운 모임으로 옮기면 되니 부담이 적고 맘도 편하죠."

2014년쯤부터는 1인 가구가 많은 홍대 앞 등을 중심으로 'SNS 반상회'라고 불리는 주민 모임도 활발히 열린다. 지역 주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일반 반상회와 달리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열려있다. 망원동 주민 모임인 '망원동 좋아요'는 페이스북 페이지 가입자만 1만2000명이 넘는다. 연남동 모임인 '연남동 부르스' 역시 페이스북으로 1000명 가까운 회원이 모였다. 대부분은 SNS로 대화하고 때때로 실제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집밥 모임, 중고물품 나눔, 치맥 번개를 하면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식이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송모(여·27)씨는 지난 19일 '망원동 좋아요' 페이지에 "저녁때 동네에서 배드민턴 칠 친구들을 모은다"고 글을 올렸다. 그는 평소에도 동네 사는 사람 중에 시간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운동을 한다. 송씨는 "현재 일을 그만두고 이직 준비 중이라 '직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위축감이 들 텐데 배드민턴 모임에서는 서로 운동만 하고 흩어진다"며 "몇 번 본 사람끼리도 '다시 오면 반갑고 아니면 말고'라는 마음으로 만나기 때문에 여느 만남보다 숨통이 트인다"고 했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속적이고 책임감 있는 관계를 만들려면 그만큼 시간도 들이고 감정을 쏟아야 하는데 요즘 세대는 그러한 관계에서 소속감보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며 "강한 연대(strong tie)를 강요하는 인간관계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나홀로족을 택하기보다는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기 방식을 찾아 나선 것"이라고 했다.

스펙보다 중요한 '있어빌리티'

느슨한 공동체가 성별이나 나이, 취향, 경제수준과 상관없이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이들에게는 '코드'가 맞아야 같이 놀 수 있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다. 러닝클럽에 참여해 이따금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한다는 한모(여·26)씨는 "서로 신상 정보를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는 차림새나 생활방식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평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이런 곳에선 자신의 학벌·직업을 내보이는 사람은 '촌스럽고 못난' 사람으로 여겨져 오히려 눈총을 받는다. "주말에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얼마나 풍성하고 개성 있게 답을 하느냐가 모임에 잘 안착할 수 있는 잣대로 통용되기도 한다. "그냥 늦잠 자고 집에서 쉰다"는 답변을 했다간 겉돌기 십상이라고 했다. "요즘 강원도 양양 해변에서 서핑 배워요"처럼 이른바 '있어빌리티(남달리 스스로를 포장하는 능력)'가 있어야 이런 모임에서 쉽게 어울릴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정재형(34)씨는 최근 직장인 번개 모임에 나갔다가 얼굴이 후끈거렸다고 했다. 어떤 영화를 가장 인상깊게 봤느냐는 말에 "'해운대'를 재밌게 봤다"고 답했는데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는 것. 정씨 뒤를 이어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소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르덴 형제, 페드로 알모도바르, 미카엘 하네케 등 외국 감독 이름들을 술술 댔다. 정씨는 "은근히 배척되는 느낌이었다"면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끝까지 함께하려는 고교 동창이나 회사 동료들을 떠올리니 이런 가벼운 관계가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서울 서촌에서 열리는 책 낭독회에 몇 번 참석했다는 성모(34)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이런 모임에 나갈 때마다 내가 얼마나 생각이 깊고 취향이 좋은 사람인지 증명해야 하는 게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며 "직업을 대놓고 물어볼 수 없으니 '즐겨 마시는 와인이 뭐냐', '해외 여행지 중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냐' 같은 질문으로 그 사람의 경제 수준을 가늠하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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