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 인식 뒤틀려도.. '무늬만 성교육' 고집하는 교육부

김민정 입력 2016. 7. 1. 04:53 수정 2016. 7. 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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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강남역 살인ㆍ소라넷 폐쇄 사태 등

여혐ㆍ차별 현상 갈수록 심각한데

교육부 “학부모 단체 반발 등 우려”

표준안에 젠더ㆍ性 인권 내용 빠져

“양성 평등 문제 등 교육 시급” 지적

“성교육 시간 내내 ’남자랑 자면 안 된다. 임신하면 평생 후회한다’는 식의 얘기만 하니 여학생들이 싫어하더라구요.” 서울 서대문구의 한 남녀 공학 중학교를 올해 초 졸업한 김성모(16ㆍ가명)군이 돌아 본 중학 시절 성교육 수업은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김군의 학교는 격주로 45분씩 배정된 보건 시간을 활용해 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현실을 외면한 ‘겁주기’ 교육으로 일관됐다는 게 김군의 설명이다. 학생들의 왜곡된 성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교육도 전무했다. 김군은 “친구들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유행하는 ‘김치녀’, ‘된장녀’ 같은 단어를 일상 용어처럼 재미로 막 쓴다”며 “국어 선생님이 지나가면서 ‘그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 것 말고는 이게 왜 문제인지 배워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고등학생의 성교육 시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 고양시의 한 고교 3학년생 김윤아(18ㆍ가명)양은 “성교육 시간이 1학년 때 딱 두 번 있었는데 ‘낯선 남자가 접근했을 때는 분명히 거절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식의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얘기만 반복했다”며 “그나마도 두 번의 교육 시간 중 한 번은 거절하지 않고 남성을 따라갔다가 성폭력 피해를 입게 되는 여성에 대한 황당한 동영상을 틀어줬다”고 전했다. 김양은 “양성 평등, 성차별 시정에 관한 내용은 가정 시간에만 잠깐 언급됐을 뿐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강남역 살인 사건, 소라넷 폐쇄 사태 등을 계기로 여성혐오ㆍ차별 현상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했지만 양성평등 의식 교육에 대한 당국의 무신경은 여전하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청소년들의 성(性) 인식 왜곡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도 학교 현장의 성교육은 구태의연하고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부가 건전한 성평등 의식 확립에 필수적인 젠더ㆍ성 인권 교육 내용을 ‘성교육 표준안’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 논란도 예상된다.

교육부 관계자는 30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그간 여러 차례 문제점을 지적 받은 성교육 표준안을 여성정책연구원에 연구 용역을 맡겨 최종 수정 작업 중이지만, 7월 중 나오는 용역 결과와 무관하게 젠더 교육과 성인권에 관한 내용은 표준안에 넣지 않는다는 게 교육부 입장”이라고 밝혔다. 교육부의 기존 성교육 표준안은 임신, 출산, 피임에 관한 생물학적 설명, 성폭력 대처 방안 등을 주로 담았다. 반면 성 차별, 양성 평등 문제 등을 다루는 젠더 교육과 성 인권 내용은 빠져 있어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관련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이런 내용을 표준안에 포함하라고 요구한 상태였다. 그러나 교육부 관계자는 “청소년들은 아직 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미숙한 상태고 학부모 단체들의 반발도 있을 수 있어 성소수자 내용이 포함된 젠더 교육이나 성 인권 교육은 하지 않는 쪽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美 등 해외선 성교육 가이드라인에 ‘젠더 교육’ 명시

전문가들은 교육부의 고루한 성교육 방식을 꼬집었다. 정현미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젠더법 전공)는 “젠더 교육은 특정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기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인지 가르치는 것”이라며 “성별의 차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차별과 혐오의 근거로 진화하는지 배우기 위해 공교육 현장에서 젠더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도 “상대방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인권을 존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공교육 차원에서 통합적인 인권 교육을 통해 가르쳐야 일상에 만연한 물리적, 언어적 성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제사회의 성교육 가이드라인은 젠더ㆍ성 인권 교육 내용을 포함하는 게 일반적이다. 2009년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국제 성교육 가이드라인(International Guidelines on Sexuality Education)’도 ‘젠더 편견에 기반한 사회적 관행과 폭력, 젠더 불평등이 강화되는 방식에 대해 가르칠 것’을 안내하고 있다. 미국 성정보교육위원회(SIECUS)가 1991년부터 적용 중인 ‘포괄적 성교육 가이드라인’ 역시 성교육 핵심 내용으로 아동ㆍ청소년의 젠더 정체성을 명시하고 있다.

교육부가 팔짱을 낀 채 외면하는 사이 일선 교육청을 필두로 성 평등 교육 변화 조짐도 보이고 있다. 올해 전국 시ㆍ도 교육청 가운데 처음으로 임기제 성인권정책전문관을 채용한 서울시교육청은 자체적으로 ‘성 인권 교사 직무 연수’를 계획했다. 연수를 신청한 교사 30명은 오는 11일부터 15일까지 총 15시간 동안 젠더 감수성과 성 인권 국내외 사례 등에 관한 직무 연수를 받는다. 목소희 시교육청 성인권정책전문관은 “여성 혐오와 성차별 문제 등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3일 만에 정원이 차는 등 현장 교사들의 관심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며 “하반기에는 성 인권 교육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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