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마를 보았다' 타자들의 공포 슬럼프의 세계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2016. 6. 3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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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의 박병호가 지난 27일(한국시간) 양키스와의 경기를 더그아웃에서 바라보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이매진스
KT 이진영. 사진|연합뉴스
SK 박정권. 사진|SK제공

슬럼프는 타자에게 ‘악마’처럼 다가온다. 예고없이 찾아와 마음과 몸을 모두 망가뜨린다. KT 유한준은 “마치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자꾸만 몸이 빨려들어가는 모래 늪에 빠진 기분이 든다. 무슨 짓을 해도 빠져나올 수가 없다가 결국 힘이 빠져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고 했다.

메이저리그 볼티모어에서 뛰었던 브래디 앤더슨은 팀 동료가 운전하던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한 밤 중 폭우 속에서 거침없이 달리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약 지금 타율이 1할7푼8리만 아니었더라도 조금 천천히 가라고 할 거야”. 한 밤 중 폭우 속 난폭운전이 슬럼프 보다 낫다.

박병호(30·미네소타)가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지난달 타율은 1할3푼6리. 최근 11경기 타율은 5푼3리(38타수 2안타)밖에 되지 않는다. 같은 기간 장타율도 0.132에 머물고 있다. 장성호 KBS N 해설위원은 “단언컨대, 기술의 문제는 아니다. 슬럼프는 마음의 문제”라고 말했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찾아온다. 제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슬럼프를 피할 수는 없다. 아무도 없는 시내 도로를 달리더라도 언젠가, 분명히 빨간 신호등을 마주치는 것과 같다.

KT 이진영은 지난 시즌 지독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통산 타율 3할4리의 이진영은 지난해 타율이 2할5푼6리에 머물렀다. 이진영은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나만 힘들면 괜찮은데, 집안 식구 모두가 내 눈치만 본다. 신경 써 준다고 하는 건데, 마음이 더 아프다”라고 말했다.

리그 최고의 슬럼프 전문가는 단연 SK 박정권이다. 박정권의 별명은 ‘가을 정권’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여름마다 괴롭혔던 지독한 슬럼프 때문이기도 하다. 박정권은 “4~5년째 이러고 있다. 나는 진짜 바닥을 봤다”고 말했다. 박정권은 “지난해에는 하도 고민을 하다 보니 머리에 원형 탈모가 다 생겼다”고 했다.

슬럼프에 빠지면 타자들은 ‘모든 짓’을 한다. 유한준은 “엄청나게 쳐 보기도 하고, 정신없이 달려 보기도 한다. 명상도 기도도 닥치는대로 다 해봤다”고 말했다. 뉴욕 메츠의 간판 타자 데이비드 라이트는 ESPN과의 인터뷰에서 “슬럼프에 빠지면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별 생각을 다 한다. 방망이 크기, 무게, 상대 투수의 볼배합, 바지를 입는 방법까지”라며 웃었다. LG 이병규(9번)는 잠을 자는 대신 벌거벗은 채 거울을 보고 스윙을 하기도 했다.

박정권은 “슬럼프가 오면 일단 작은 것부터 바꿔본다. 바지도 올려입고, 발 끝의 위치, 타격 때 손의 위치 등도 조정한다. 그러다 안타 1개 나오면 그대로 유지한다”면서 “그러다 차츰차츰 무너지는 거다. 안타 1개 치겠다고 조금씩 바꾸는 것들이 결국은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고 말했다.

슬럼프 탈출 비결에 대해서는 “정답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진영은 “건망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타석의 결과를 빨리 잊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SK에서 뛸 때 안타를 못 때리면 잔뜩 인상을 썼다. 이진영은 “그때 브리또가 교훈을 줬다. ‘노 프라블럼, 투모로우’라고 하더라. 야구는 내일도 하고, 모레도 하는 경기다. 오늘에 갇히면, 슬럼프가 길어진다”고 말했다.

유한준은 “슬럼프를 벗어나려면 스트레스를 관리해야 한다. 힐링이 최우선이다”라고 말했다. 박승호 NC 타격 코치는 “미국 코치 연수 시절 스스로가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하더라. 영화 감상 등 야구를 잊고 취미 활동을 하는 게 필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한준은 오랜 시행착오 속에 자기만의 비결을 하나 찾았다. 유한준은 “수첩에 슬럼프라고 생각했을 때 해 보는 일종의 리스트를 적어뒀다. 안 좋을 때 그걸 1번부터 하나씩 해 본다. 안되면 2번, 3번, 4번 순으로. 그렇게 하다 보면 돌아오는데, 어쩌면 슬럼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 리스트에 집중하는 효과 때문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숭용 KT 타격코치는 “슬럼프의 1번 요인은 체력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늦어지고 타격 타이밍이 늦게 된다”고 말했다. 김재현 한화 타격코치 역시 “체력이 부족하면 배트 스피드가 느려진다. 스피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체력과 스피드를 회복하는 방법은 2가지로 나뉜다. 단거리 달리기를 강조하거나, 휴식에 집중한다.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단거리파다. 양 위원은 “단거리 달리기를 많이 했다. 다리도 빨리 움직이지만 팔을 빨리 움직이는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박병호는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없지만 이진영은 “타석 결과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아웃되더라도 ‘아, 내가 이번 타석에서는 뭘 배웠구나’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야구 못하는 건 아니니까, 새 야구를 배운다는 기분으로 하면 스트레스 덜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이숭용 코치는 “코치는 관리가 아니라 관심이다. 미네소타 코칭스태프도 열심히 하겠지만 박병호가 ‘관심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정권은 “그 관심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권은 “혼자 머리 싸매봤자 아무것도 안된다. 내가 4~5년 동안 배운 게 바로 그거다. 아무하고나 얘기해라. 야구 관계자가 아니라도 좋다. 아내는 물론 아이와도 얘기하는 게 좋다. 가능한 많은 사람과 무슨 얘기든지 하면 뭔가가 풀리더라”라고 말했다.

적극성은 슬럼프를 공략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박병호를 오랫동안 지켜 본 심재학 넥센 코치는 “슬럼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가 쳐야할 공에 방망이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이다. 절대 망설이지 말고 자신감있게 휘두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고 말했다.

슬럼프는 ‘악마’처럼 슬금슬금 달라와 옭아매지만, 어느 순간 구름이 걷히듯 사라진다. 박정권은 지난 7일을 마지막으로 2군에 내려갔다. 그때 타율은 2할3푼9리였다. 약 보름이 흐른 뒤 복귀했고, 지난달 29일 경기까지 최근 5경기 타율이 5할6푼3리(16타수 9안타)다. 29일 수원 KT전에서 박정권은 안타 2개, 2루타, 3루타 각각 1개씩 4안타 경기를 펼쳤다. 경기가 끝난 뒤 박정권은 “도대체 얼마만의 4안타 경기인지 모르겠다”면서도 “슬럼프가 끝났다고? 이제 안 올 거라고?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경기를 하면 기분전환은 된다. 기분이 좋으면 모든 게 다 잘 된다. 지금은 야구장에 올 때 가능한 유쾌한 마음으로 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슬럼프라는 ‘악마’를 쫓아내는 가장 강력한 부적은 어쩌면 ‘유쾌한 웃음’이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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