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매주 수만권의 책들이 버려집니다

류영현 2016. 6. 2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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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도서정가제의 그늘.. 썰렁한 파주출판도시 르포 / 할인판매 없어지며 사람들 외면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세종출판벤처타운 마당에는 매주 수만권의 책들이 쌓이곤 한다. 여기에 모인 책들은 폐기물 처리 차량에 실려 재활용 처리시설로 운송된다. 성인 남자의 키를 훌쩍 넘길 만큼 거대한 책더미는 주로 서점에서 반품되어 온 책들이거나 서점에 출고되지도 못한 재고품들이다. 특히 출간 된 직후부터 창고에 쌓여 아직 잉크냄새도 가시지 않은 신간들도 많다. 출판사들은 보관료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서둘러 반품·재고품을 내다버리면서 이같은 현상이 빚여진다.

중소출판사들이 주로 모여 있는 세종벤처타운 마당에 어른 키 높이로 쌓여있는 책더미. 매주 폐기물 처리 차량에 실려 재활용 처리시설로 운송된다.
지난 25일 주말을 맞이해 찾아간 파주 출판도시는 썰렁하다 못해 적막하기 까지 했다. 예전 같으면 자녀들의 손을 잡은 부모들이 모여들어 북적이곤 했다. 출판사들이 주말을 맞아 할인 판매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출판사들이 늘어선 이곳에 책을 사려고 오는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만난 출판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정가의 절반 이하의 값에 책을 사는 재미로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으나, 지금은 그런 쏠쏠한 재미조차도 없어졌는지 발길이 뜸하다”면서 “수백개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출판도시가 휴일엔 마치 유령 도시 같다”고 말했다. 주말이면 출판사 종사자들이 휴일이라 그럴 수 있지만, 할인 판매하는 책이 없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진 것이다.

파주 출판도시의 대표축제인 ‘파주북소리축제’가 예전같으면 50%이상 싼값에 책사는 재미로 사람이 넘쳐났지만, 지난 5월 열린 축제에서는 찾는이가 거의 없어 썰렁한 모습이다.
매년 5월이면 열리는 ‘파주북소리축제’ 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014년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에는 책을 사려는 사람들로 제법 흥청거렸다. 당시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50∼90%까지 싸게 팔아 재고 소진의 기회로 삼았고, 소비자들은 싼값에 책을 구입할 수 있었다. 올해는 고작 10%밖에 할인이 되지 않으니 굳이 먼 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새늘출판사 이영환 사장은 “대부분 신간을 낸지 한 두달 내 출고 분의 50~60%가 반품되어 돌아온다”면서 “도서정가제 이전 같으면 정가를 다시 매기는 ‘리퍼북 작업’으로 판매하거나, 축제 같은 때에 할인 판매하여 어느 정도 제작비를 회수했으나, 지금은 두 가지 방식 모두 길이 막혀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또, 리퍼북 작업을 하려해도 인건비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서정가제 때문에 할인 판매는 아예 엄두조차 낼 수가 없다. 도서정가제를 위반할 경우 300만원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출판사들은 편집비와 인쇄비는 커녕, 종이 값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책을 대량 폐기하면서 국가적인 자원 낭비는 물론, 지식산업 자체가 쪼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이 사장은 “도서정가제의 최대 수혜자는 중간 도매상과 유통 업체에 불과한 온라인 서점들”이라면서 “출판시장 최종 소비자의 선택권을 배려하지 못한 나머지 출판가는 완전 얼어붙었다”고 말했다. 2013년 도서정가제를 주장했던 출판사 대표들조차 장사가 안 되어 폐업한 곳이 생겼다.

문화체육관광부나 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 정부 당국은 어떻게든 ‘책 보는 문화’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지식문화와 ‘책 보는 사회’ 부흥을 위해 파주출판도시도 만들었지만, 애초 취지와는 동떨어져 있다.

도서정가제의 취지는 학술·문예 분야의 고급서적 출간이 위축되는 것을 막고, 동네서점을 살리자는 데서 시작됐다. 정가대로 책을 팔아 동네서점에 적정한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동네서점은 대규모 온라인 서점의 물량공세와 할인공세에 치여 고사 직전에 몰렸었다. 정가제 시행 초기엔 동네서점의 매출도 약간 신장되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더 힘든 상황으로 내몰렸다. 반대로 대형 온라인 서점들의 경우 역시 매출은 줄었지만 영업 이익은 대폭 늘었다.

캐나다 등 외국의 동네서점들이 지나간 책들을 대폭 할인 판매해, 출판사들이 재고떨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도서출판 새늘 제공
‘출판저널’ 대표 에디터인 정윤희씨는 “정부 당국자들은 입법만 할 줄 알았지 도서정가제가 초래할 부정적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문제는 출판사들이 생존하는데 허덕이거나 쓰러질 경우 양질의 출판 콘텐츠가 생산·성장할 수 없다는데 있으며, 결국 국민적인 지적 수준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 고 말했다.

출판업계에서는 이 같은 도서정가제를 보완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영환 사장은 “반품도서 및 1년이 지난 구간 도서의 경우 일정한 절차를 거쳐 할인판매를 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만들어 주는 방식으로 다시 소비시장을 살리고 출판사들의 활로를 열어 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사진 = 도서출판 새늘 제공

<도서정가제란>

책값의 과열 인하 경쟁에 따른 학술·문예 분야의 고급서적 출간이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출판사가 정한 가격대로 팔도록 정부가 강제하는 제도. 2003년 도입된 뒤 2007년과 2014년 개정됐다. 이로 인해 모든 도서를 종류에 관계없이 정가의 10%, 간접 할인 5%까지만 허용하도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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