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은 잊지 못했다

2016. 6. 2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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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세월호의 또 다른 피해자, 구조 작업 참여한 민간잠수사의 삶… 고 김관홍 잠수사의 동료 유충렬씨 인터뷰

6월19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세월호 민간잠수사 고 김관홍씨의 영결식이 치러지고 있다. 연합뉴스

물속에서 그들은 슬지 않는 강철이었다. 적어도 20년 이상 바닷속에서 부딪치고 깨진 만큼 단단해졌다. 인명 구조는 최소한의 자격 요건이었다. 장비를 갖추면, 수중 300m 아래 칠흑 같은 어둠에서도 작업이 가능한 게 잠수사다.

화약을 섞어 필요한 폭약을 직접 만들고, 물속 수십m 아래서 수중폭파를 비롯해 절단, 용접, 전기로 철근을 이어붙이는 게 모두 이들의 몫이다. 철근이나 체인을 이어붙여 거대한 배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해병대 특수수색대나 해군 해난구조대(SSU)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이가 많다. 잠수는 그들에게 자존심이자 자부심이었다.

“물속에서 마음으로 울었다”

단순한 잠수 기술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심장이 단단해야 했다. 자칫 장비를 잘못 다뤘다가는 실수로 동료를 죽일 수도 있다. 동료들과 연대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고 김관홍(42) 잠수사는 생전에 세월호 구조 작업 참여 과정을 설명하면서 “저희 형제들이 모이기 시작해서… 5월10일을 넘어서야 25명이 채워졌다”고 말했다. ‘형제’란 말을 썼던 게 어쩌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강철 같던 잠수사들을 극한으로 몰고 간 것은 ‘공포’가 아니라 ‘연민’이었다. 정예 민간잠수사들이 투입됐을 때, 세월호 실종자 구조 작업은 사실상 ‘주검 수습 작업’ 단계였다. 어떻게 그때를 잊을 수 있을까? 세월호 구조에 참여했던 유충렬(53)씨는 당시를 이렇게 되돌아봤다.

“현장 구조에 나섰던 어떤 잠수사도 당시를 절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주검 수습을 위해 바닷속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손대는 순간, 숨을 거두던 당시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옵니다. 창문마다 온 힘을 다해 손톱으로 긁은 흔적이 있고, 방 사이를 가로막은 칸막이벽들이 주먹으로 쳐서 다 부서졌어요. 잠수사들은 주검이 된 상태에서라도 아이들의 부모를 모두 찾아주고 싶어서 그곳에 갔습니다. 물속에서 마음으로 울어야 했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유씨는 세월호 수색 과정에서 수중 수색을 전담했던 ‘25인의 민간잠수사’ 가운데 구조팀장 구실을 했다. 특히 마지막으로 구조한 단원고 희생자 ㅎ(당시 17살) 학생을 찾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미 구조 작업이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희생자를 한 명이라도 더 찾기 위해 매일 선체에 들어가던 때였다.

“구조 작업을 끝내기 전, 마지막에 찾은 희생자가 ㅎ 학생이었어요. 여러 정황을 봤을 때, 2층 여자화장실에서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거의 매일같이 그곳을 뒤졌습니다.” 가는 길이 벽체에 막히면, 물속에서 도끼로 벽체를 다 깼다. 그때마다 경첩 같은 것들과 함께 내부 벽체, 천장이 무너졌다. 세월호 자체가 흉기가 되어 잠수사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주검이라도 부모님 품으로 돌려보내고 싶었어요. 주검에 가스가 차면 가라앉지 않고 물 위를 떠다니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손으로만 더듬다보면 사람인지 선체 파편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찾기 힘들었던 거예요. 결국 예상했던 화장실에서 물 위에 떠 있던 ㅎ 학생을 찾았습니다. 더듬거리며 손을 잡았는데, 이미 가벼운 충격에도 살이 밀릴 정도로 부패가 많이 진행된 상황이었어요. 아이를 물 밖으로 꺼낸 그날이 ㅎ 학생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순간들을 어떻게 온전히 잊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덩어리처럼 엉킨 주검들끼리 손을 잡고, 끝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 적도 있다. 이런 말을 되뇌었다. ‘그래, 이제 가도 된다, 이제 가자.’ 그의 매서운 눈매가 이내 붉어졌다. 유씨는 “주변 사람들이 당시 상황을 묻는 경우가 있지만,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고, 당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면 한동안 지워내기가 힘겹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초 30년 넘게 했던 잠수일을 접고, 고향인 경남 진주에 재활용센터를 차렸다.

25명 가운데 8명 심각한 트라우마

유씨처럼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견디고 다른 삶을 찾은 경우는 그나마 나았다. 당시 민간잠수사 25명 가운데 11명이 현업에 복귀하지 못했다. 이 가운데 8명은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극심한 트라우마를 끝내 이기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고 김관홍 잠수사가 그랬다. 민간구조팀의 유충렬씨가 “남들이 꺼리는 일에 선뜻 나서고 밝고 활달했던 친구”라고 기억하는 김씨였다.

1973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태어난 김씨는 1994년 군에서 제대한 뒤 20여 년간 잠수사 생활을 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7일 만인 4월23일 다른 민간잠수사들과 함께 일찌감치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 아직 세월호 안에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거론되던 때였다.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었으면 우리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번밖에 들어가면 안 되는 그 수심에서 많게는 하루 네 번, 다섯 번….”

-고 김관홍 잠수사

지난해 9월 국정감사 증인으로 참석한 김씨는 “(세월호 현장에 처음 왔을 때는) 민간잠수사가 일곱, 여덟 분밖에 안 계셨고 5월10일이 넘어서야 25명이 채워졌다”고 했다. 이 가운데는 당시 해양수산부 차관이 직접 민간잠수사들에게 구조 작업 참여를 요청해 데려온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정부의 현장 대책이란 게 형편없었다. 주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켜지지 않았다. 국감장에서 김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보디백(주검을 담는 대형 겉싸개) 줘, 그랬더니 쌀포대를 주더라니까요. ㅎ 학생 마지막 나왔을 때 어땠는지 알아요? 80kg짜리 쌀포대 두 개 쪼개서 모시고 나왔어. 주검에 대한 존중이 필요했는데도요.”

구조 작업 대부분은 25명에 불과한 민간잠수사에게 의존했다. 김씨는 “해경 잠수부는 (구조를 위해 물속으로) 들어갈 능력도, 장비도 안 됐다”고 말했다. 잠수사들은 목숨을 걸고 구조에 나섰지만, 이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었으면 우리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잠수병 등의 이유로) 하루에 한 번만 들어가야 하는 그 수심에서 많게는 하루 네 번, 다섯 번(들어갔다).” 매일 부대끼는 실종자 가족들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육체의 극한까지 몰고 갔다.

어지간한 베테랑도 감당하기 힘든 일

2014년 4월24일 세월호 실종자 구조 작업에 나선 민간잠수사들이 전남 진도군 사고 해역으로 뛰어들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김씨가 기억하는 주검 수습 과정도 고통 그 자체였다. “희생자들은 극심한 공포와 낮은 수온, 수압에 의해서 아주아주 고통스럽게 사망하셨습니다. 수중에서 만난 희생자들이 … 머릿속으로 만져지고, 느끼고, 냄새로…. 그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 엉켜서, 저희 손으로 한구 한구 달래가며 안아서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조 작업이 길어질수록 곳곳에서 잠수사들의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세월호 구조에 동참한 이들 가운데는 이후에 어깨뼈가 썩어서 주저앉거나, 관절 괴사로 인해 인공뼈를 해넣은 이들도 있었다.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4월30일 사고로 인해 죽었다 깨어났습니다. 허리디스크 두 군데, 목디스크 한 군데, 어깨 회전근막, 그리고 트라우마…. 저는 골괴사가 안 나왔지만, 다른 형님 여덟 분은 골괴사로 고생하십니다. 그중의 한 분은 치료를 받았고, 한 분은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2015년 9월 국정감사 증언)

정신적 고통은 김씨의 몸 안에서 곪아갔다. “솔직히 두렵고 도망가고 싶었던 건 사실이에요. 나도 가족이 있고 내 생명이 위험하다는 걸 아니까요. 죽음을 매번 생각해야 하고, 지금 나온 주검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병원에 있을 때, 애들이랑 내가 숨바꼭질을 해요. 꿈속에서.”(다큐멘터리 영화 <동거차도> 인터뷰)

김씨를 한 번 더 주저앉게 만든 것은 정부의 태도였다. 검찰은 민간잠수사 공우영 잠수사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고발했다. 2014년 5월6일 세월호 구조 작업 과정에서 잠수사 이광욱씨가 호흡곤란 등으로 사망하자, 당시 선배였던 공씨에게 관리 책임을 물었다. 해경이 현장을 통솔하고 책임졌지만 엉뚱하게 민간잠수사에게 잘못을 물은 것이다. 재판부는 1년6개월여 만에 무죄판결을 냈다. 하지만 민간잠수사 25명은 황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정부는 지난 3월 민간잠수사들에 대한 치료비 지원도 중단했다. 세월호 특별법에서 정한 피해자에 민간잠수사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그것 때문에 잠을 못 자요. 생활이 안 돼요. 몸이 다쳐서. 내가 왜 그래야 해요. 끔찍한 생각을 해야 하고. 그 잘나가는 잠수사인 내가 왜 대리운전 기사가 돼가지고….”(4·16연대와의 인터뷰)

피해자 범위 확대하는 특별법 개정안 발의

김씨는 지난 6월17일 아침 7시52분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쓰러져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그는 낮에는 꽃집을 운영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김씨는 지난 4·13 총선에서 당선된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당시 국회의원 후보 돕기를 자청했다. 박 의원은 지난 6월18일 열린 김관홍 잠수사 추모문화제에서 “돌이켜보면, 잠수사님은 저의 당선이 정말 절실했고, 저를 통해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틀 뒤인 6월20일, 박 의원은 ‘세월호 참사 피해지원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세월호 피해자 범위를 확대하고, 배상·위로지원금 신청 시기 제한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여기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구조·수습 활동으로 인한 사망자 혹은 부상자를 의사상자로 지정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현행 특별법은 ‘세월호 승선자 및 그들의 배우자 및 직계존비속과 형제자매’로 지원 대상을 제한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세월호 구조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 가운데 절반가량은 신체적·정신적 문제로 현업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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