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학원 강의식 '요점 정리' 인문학.. 득일까, 독일까

유석재 기자 2016. 6. 27.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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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해설 강의와 책의 明暗] 스타 강사 설민석 '어쩌다 어른'서 "性불구 된 경종, 장희빈 때문.." 歷史보단 재미 위주 해석 논란 "어려운 인문학 쉽게 접근하지만 강의 오류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아들의 '고추'를 있는 힘껏 잡아당긴 거예요. 아예 불구를 만든 거예요. 그 아이가 그다음 왕인 경종이에요." 지난 9일 방송된 OtvN '어쩌다 어른'에서 한국사 강의를 하던 스타 학원 강사 설민석(46)씨가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청중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숙종의 빈이자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이 사약을 받아 죽으면서 자기가 낳은 세자를 성불구자로 만들었다며, 장희빈이 당시 '너도 나중에 커서 네 아빠처럼 막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내 가슴에 피못 박을 거야? 내가 그런 일 없게 만들어 줄게'라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방송을 본 전공자들은 "어떻게 저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TV 방송에 나갈 수 있느냐"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실록 등 공식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장희빈이 차마 할 수 없는 악담을 하고 손으로 세자의 아랫도리를 침범했다'는 내용이 노론 측 기록인 '농수수문록(農叟隨聞錄)'에 나오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설씨가 이날 강의에서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기 가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설명한 것에 대해서도 '당쟁이 심하던 시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해석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는 "이런 얘기를 전 국민이 보는 TV 방송을 통해 한다는 것은 문제가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설씨의 강의는 '역사를 흥미롭고 쉽게 풀어준다'는 점을 파고들어 시청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

◇'장승업 황당 강의' 강사 책 여전히 베스트셀러

2014년 말 출간 이후 인문서의 베스트셀러로 주목받은 단행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채사장 저, 이하 '지대넓얕')은 역사·사회·윤리 등 인문학의 내용을 학원 강의처럼 물 흐르듯 요점 정리한 책이다. '무지했던 것들에 대해 쉽게 알려주는 책'이란 찬사와 '깊게 읽어야 하는 인문학을 요점 정리로 뒤바꾼 반(反)인문학 책'이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이 책은 1·2부 합쳐 100만 부가 팔려 출판계의 불황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26일 현재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지대넓얕' 1부는 인문 분야 5위, 2부는 8위였으며 같은 저자의 '시민의 교양'이 18위였다. 역사/문화 분야에선 설민석씨의 '무도 한국사 특강'이 1위였고 같은 저자의 '첫출발 한국사 연표'는 4위였다. 최근 설씨와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엉뚱한 그림을 장승업 작품이라고 소개해 물의를 빚고 하차한 학원 강사 최진기씨의 '교실 밖 인문학'도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올라 있었다.

◇아카데미즘의 벽은 허물었으나…

대중을 상대로 인문학을 쉽게 해설해 주는 '학원식' 강의와 단행본이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어렵다는 인상이 강했던 인문학에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강의의 오류나 일방적 해석까지도 여과 없이 받아들일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시험에 대비하듯 정답 위주로 '요점 정리'해서 내놓는 방식이 젊은 세대에게 익숙해진 결과이지만 인문학 강의까지도 그런 식으로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라는 얘기다.

지난 24일 교보문고 광화문점 인문서 코너에서 마주친 20대 회사원 A씨는 "대학 시절 교양 강의는 억지로 들었지만 '지대넓얕'을 읽고 나니 비슷한 다른 책들을 찾게 된다"고 했다. 원로 역사학자 B씨는 "설민석씨의 강의엔 지나친 해석도 종종 눈에 띄지만,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게 보인다"며 "엄숙하고 딱딱하던 아카데미즘의 벽을 대중 앞에서 허무는 순기능을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찰 위한 디딤돌 삼아야"

'오히려 인문학을 망친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가 남이 떠먹여 주는 지식만 찾는다면 사회적 수준이 앞으로 더 하향 평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인문학의 본질은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 성찰하는 것인데, '요점 정리'식 분위기에서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포기하기 쉽기 때문에 성찰을 방해받게 된다"고 했다. 그는 "가벼운 인문학 강의나 인문서에 나온 내용이 최종 결론이나 정답이라고 생각해선 안 되고, 더 깊은 성찰을 위한 디딤돌로 삼을 경우에만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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