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해결, 행정이 논쟁을 대체하다?

박은하 기자 입력 2016. 6. 2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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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남도학숙 성희롱’ 피해자, 따돌림 등 2차 피해 감사 청구… “피해 없음” 유야무야 처리
광주시청을 찾은 시민이 로비에 설치된 터치 스크린을 통해 ‘광주인권헌장’의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광주는 2012년 아시아 도시로는 처음으로 인권헌장을 제정했다. / 강윤중 기자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남도학숙 직원 ㄱ씨는 6월 9일 김완기 남도학숙 원장 이름으로 된 주의조치를 받았다. 동료들 간의 대화내용을 무단으로 녹취하고 잘못된 사실을 시민단체와 언론 등 외부로 알려 직장의 분위기를 해치고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잘못된 사실’이란 남도학숙 내에서 벌어진 성희롱 사건에 대한 후속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성희롱 사건을 고발한 것에 대한 ‘2차 가해’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ㄱ씨는 같은 부서 ㄴ부장이 회식 때 술시중을 강요하고 업무중 손과 가슴을 밀착시키는 등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하고, 성희롱 행위에 대해 항의하자 “술집여자와 같은 행실” 등을 운운해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지난해 5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지난 3월 성희롱 사실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고, ㄱ씨는 조사가 진행되던 11개월 동안 ‘따돌림’ 등 2차 피해를 입었다며 남도학숙의 관할 기관인 광주광역시에 감사를 청구했다. (<주간경향> 1173호 보도)

광주시는 4월 7일 감사관 2명, 청년인재육성과 소속 공무원 1명을 파견해 남도학숙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ㄱ씨의 부모가 시에 민원을 접수한 것에 대한 조치였다. ㄱ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3월까지 인권위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원래의 사무실 대신 도서관 맞은편에 위치한 유리 외벽으로 된 사무실에서 혼자 근무했다. 조사기간 동안 성희롱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해야 한다는 인권위 방침에 따른 조치였다. 피진정인 대신 진정인을 별도로 분리시킨 조치였다. ㄱ씨는 남도학숙 측이 사람들의 이동이 잦고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사무실에 자신을 배치시켜 사실상 “동물원 원숭이마냥” 구경거리로 만들었으며, 유선전화를 끊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사무실 밖에 위치한 CCTV로 감시했다고 주장했다. 인권위 결정이 나온 이후에는 원래의 사무실로 복귀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ㄴ부장이 인사조치를 당했으나, ㄱ씨는 업무에서 배제되고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 등 ‘은밀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인권위에서 권고한 남도학숙 임직원 대상의 인권교육도 형식적이었으며, ㄱ씨에게 호의적인 학숙 내 직원이나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했다고도 주장했다.

광주시는 4월 25일 ‘2차 피해 없음’이라는 감사 결과를 내렸다. 별도 사무실 근무와 관련해서는 남도학숙 관리부장이 분위기 쇄신을 위해 내린 조치로 ㄱ씨와의 면담 및 동의를 거쳤으며 ㄱ씨도 “사무실 따로 쓰니까 좋습니다”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다는 점에서 ‘2차 가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황치열 광주시 감사실 주무관은 “진정인은 처음에는 가해자와 분리된 별도 사무실을 쓰게 돼 불만이 없었지만, 차후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선생님 왜 거기 계세요?’라는 질문을 받자 모욕감을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애초에 사무실 이용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이는 ‘피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ㄱ씨가 어떤 맥락에서 “사무실 따로 쓰니까 좋다”고 답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았다. ㄱ씨 측은 “인권위 진정 이후 갈등이 생기면 ‘불만 있으면 또 인권위에 진정해’라는 식의 비아냥을 숱하게 들었고, 그렇게 관계가 나빠진 상황에서 반어적으로 한 말이 ‘동의’로 인정됐다”고 전했다. CCTV 위치 및 유선전화 불통 문제는 행정미숙에 의한 일시적인 것으로, 남도학숙 측이 개선조치를 취해 피해로 인정되지 않았다. ㄱ씨 측은 “인권위가 진정 내용만 조사하고 향후 2차 피해에 대한 조사를 누락해 이 문제에 대해 항의하는 과정에서 조치가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위 조사 이후 사내 따돌림과 관련해서는 광주시는 ㄱ씨에게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동료들 간의 신뢰행위를 깨는 (회의시간 등) 무차별적 녹취행위에 대해 직원들이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된다”는 것이다. 업무에 필요한 사항은 전자문서 등으로 공유됐기 때문에 부당한 업무배제 역시 없다고 판단했다. ㄱ씨 측은 “전자문서로 공유돼도 사무실에서 직접 대화해야만 알 수 있는 업무들이 있다. 또한 녹취는 워낙 괴롭힘을 당한 데다 인권위, 감사 등에서 피해를 입증해야 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자기보호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광주시 측은 남도학숙 원장, 사무처장, 관리부장, 장학부장 등 간부급 5명과 장학부 직원 ㄱ씨, ㄱ씨에게 우호적인 남도학숙 동료를 포함해 11명의 의견을 듣고 공정하게 반영했다고 밝혔다. 황 감사관은 “퇴직자의 경우에도 학숙 내 성희롱이나 인권침해적 분위기가 만연하지 않다는 취지의 진술을 들었다”고 전했다. ㄱ씨 측은 “민원제기 한 달이 지나 지역 시민단체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압박을 넣어 감사가 시작됐다. 추가 자료제공 요청도 없었다”고 말했다. 시 측은 “필요한 자료는 충분히 검토했다”고 설명했다.

남도학숙 측은 인권위 결정과 시의 감사 결과를 근거로 “성희롱 사안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정하게 조치했으며, ㄱ씨에 대해 다소라도 피해를 입히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ㄱ씨는 일방적 주장을 과장해 언론·사회단체에 알려 학숙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남도학숙 ㄴ부장은 보직해제 및 감봉조치를 당했다. 인권위가 권고한 ‘특별인권교육’ 수준을 넘어서는 조치다. 남도학숙 측은 ㄱ씨에게 외부기관에 사실을 허위과장해 제보하는 것과 대화 녹취를 중단하고 내부적 절차와 소통을 통해 해결할 것을 주문했다. ㄱ씨 측은 “애초에 ‘내부적 소통’으로 해결가능했다면 여기까지 왔겠느냐”고 반문했다.

남도학숙 성희롱 건이 몇 차례 언론 기사로 등장한 이후 페이스북 익명 페이지 ‘남도학숙 대신 전해드립니다’에는 학숙 내에서 성희롱 문제와 관련해 “진상을 알고 싶다”는 유인물을 배포한 학생이 장학금 중단 및 퇴소 경고조치를 받았으며, 학숙 자치기구인 자율회는 이에 침묵한다는 내용이 올라왔다. 남도학숙 측은 “절차를 어겨 주의를 준 것은 사실이다. 학생에게 사실관계가 다르다고 설명했으며 장학금 불이익 조치 등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역에서도, 중앙에서도, 시민사회에서의 이슈화도 이뤄지지 않았다. ‘화제’로 소비될 뿐이었다. ㄱ씨의 제보를 처음 접한 서울의 시민단체 관계자는 “남도학숙은 지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광주 산하기관이고, 교육기관에서 이런 낮은 인권의식을 보인다는 것은 결국 학생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다. 따라서 지역사회에서 이슈화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반면 광주지역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남도학숙 원장은 지역에서 워낙 명사고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라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싸울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김완기 원장은 광주시 행정부시장과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비서관을 지냈다. 반면 “지역에서 이슈화가 되지 않았다는 건 충분히 수긍하고 원장의 인품을 믿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남도학숙 성희롱 사건은 인권위를 통한 해결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비일비재한 ‘논쟁 없는 해결’의 전형을 보여준다.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무엇이 ‘성희롱’이고 ‘괴롭힘’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점관 사무처장은 “(실제로 술을 따른 행위는 없던 상황에서) ‘○○○씨 거기 있지 말고 옆에서 술 한 잔 따라 드려’, ‘주말에 뭐해? 애인 만났나?’ 등의 대화가 문제가 됐다. 무엇이 성희롱인지 헷갈렸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바가 우선 인정된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인권 전문기관인 인권위 조사에 결과를 맡겼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11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결론을 냈지만, 인권위가 결정해주지 않은 ‘11개월 동안’의 일과 이후 조치들이 계속 갈등의 불씨가 된 것이다. ‘11개월’과 이후의 일은 광주시 감사 결과에 맡겨졌다. 시의 감사 결과가 나오자 이견은 ‘틀린 사실’로 치부됐다. 행정이 논쟁을 대체한 것이다. ㄱ씨 측은 “학숙과 피해자 의견이 팽팽하게 갈릴 때 채택되는 기준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문제가 끝나지 않은 이유다.

광주시는 감사 결과 마지막에 “기타 인권침해 등 피해 여부는 인권전담 독립기관인 국가인권위 등을 통해 처리하도록 안내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인권위에서 남도학숙 건은 ‘끝난 사안’이다. 조직 내부에서나 시민사회에서의 ‘논쟁’을 통한 해결은 요원하고 피해자들은 국가기관만 바라보고 있는데, 국가기관은 적극적 논쟁의 장을 만드는 대신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 사소한 이슈에 문제를 크게 만들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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