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부 쓰느라 생기 잃은 중학교 교실

안정선 2016. 6. 2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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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자발성과 교사의 도움이 만나 생동하는 학교는 가능한가. 그런 시도를 하다가 ‘불온서클 금지 교칙’을 어겼다고 징계를 받던 1980년대의 고등학생들도 있었고, ‘학생회 직선제’를 논의하다가 교무실 바닥에서 엉덩이가 터지도록 매를 맞은 1990년대의 중학생들도 있었으며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2016년에도 대한민국 학교는 여전히 학생들의 자발적 활동을 팔 벌려 안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말하곤 한다. '학교에 선택할 동아리가 별로 없다고 불만만 털어놓지 말고 너희 스스로가 하고 싶은 동아리를 구상해 그것을 이해해줄 만한 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라.'

그 수업이 끝나고 한 학생이 내게 찾아왔다. '선생님, 정말 저희가 동아리를 만들 수 있어요? 만들면 지도교사 해주실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풀꽃샘 글쓰기 동아리’를 만들었다. 나는 작게나마 아이들 손으로 만들어진 동아리에 내가 참여하게 된 것이 기쁘고 좋았다. 그런데 며칠 후 또 다른 상설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동아리 담당 교사를 찾아온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 있었다. '저희가 영자신문반을 만들어도 되나요?'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담당 교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그런데 너희 정말 제대로 열심히 활동할 자신 있어? 그냥 만들어만 놓고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안 되는데….'

ⓒ박해성 그림 :

아이들의 자발성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인가. 저렇게 이야기할 교사가 아닌데 이상하다 싶었다. 알고 보니 중학교 3학년 아이들 사이에서 상설 동아리를 여러 개 가입해놓고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 아이들이 자꾸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답은 바로 ‘학생 생활기록부(생기부)’였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이라 해 논란이 되고 있는 ‘학생부’를 우리 중학교에서는 줄여서 ‘생기부’라 부른다.

학생들이 여러 동아리에 가입하는 까닭

중학교에서도 특목고나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할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생기부는 중요하다. 여기에는 수상 경력 같은 것은 기록할 수 없는 대신 방과후 수업 참여와 동아리 활동, 독서 활동, 봉사 활동을 기록할 수 있다. 거기에 기록할 거리를 마련하려고 마구잡이로 동아리 활동을 하는 아이들이 생기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서 학생부 종합전형이 생긴 목적은 분명 학생회 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한 학생, 일찌감치 나름 ‘끼’와 ‘꿈’을 모색했던 학생, 진정으로 남을 위한 봉사 활동이 무엇인지 깨우친 학생들이 학업 성적에 밀려 대학에 못 가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독서를 열심히 해서 학생부에 기록이 된 건지, 기록을 하기 위해 억지로 책을 읽거나 읽는 시늉을 한 건지, 자율적인 학생회를 이끌기 위해 내신을 돌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움직인 건지, 차라리 내신 대신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의 기록을 위해 뭔가를 한 건지….

내 제자 중에는 학교 성적은 중간 정도이지만 1년 동안 아주 알찬 책으로만 60권을 넘게 읽은 아이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던 그때 우리 반 학급문집에 ‘의 책’이라는 코너를 따로 마련했을 정도다. 또 다른 제자 중에는 ‘서체(캘리그래피)’에 관심을 가지고 독학하던 아이도 있었다. 혼자 전시회도 찾아가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그 똘똘한 아이가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은 이유는 관심사가 다양해서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아이들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 바로 ‘학종’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만약 학생종합부가 본질을 잘 살리려면 저런 학생들이 소외되지 않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남들은 다 해야 6면이면 끝나는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20면 가까이 기록하고도 ‘우리 아이 봉사활동은 (분량이 많아 보이게) 날짜별·항목별로 나눠서 기록해주세요’라고 요구하는 학부모, 특목고 진학을 위해 각종 체험활동 등에 너무 많이 참여하다 보니 더 이상 기록할 자리가 없게 된 학생, 도대체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은 건지 알 수 없는 독서기록장을 들고 온 학생을 위해 방학 내내 ‘한글 워드프로세서 입력 귀신’이 되어야 하는 교사….

중학교부터 이런 기형적인 생기부로 몸살을 앓는 현상이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중학교의 생기부도 고등학교처럼 본래의 좋은 의도와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안정선 (경희중학교 교사)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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