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의 매춘굴, 을지로·명동에 '화당(花堂)'이 있었다

김희윤 2016. 6. 2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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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경성-서울 집창촌 빅리포트①]이 땅의 <화류(花柳)여지도> ..웃음 팔던 3패기생의 영업타운
200년 전 미인의 얼굴은 이러했을까?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 속 여인은 그 복식이나 치장을 통해 사대부가의 여인이 아닌 기생임을 유추할 수 있다. 사진 = <미인도>, 신윤복, 비단에 채색, 113.9*45.6㎝ 18세기 말, 간송미술관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꽃 같은 얼굴이요 달 같은 태도로다. 정신(精神)은 추수(秋水) 같거늘 성정(性情)은 춘풍(春風)이라. 두어라 월태화용(月態花容)은 너를 본가 하노라” - 안민영,《금옥총부》

꽃처럼 아름다운 기생을 품기 위해 조선의 풍류객들은 무수히도 많은 시조와 노래를 남겼다. 법으로 성을 사고파는 행위가 불법임은 조선 또한 대한민국과 다르지 않았으되, 법이 금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 음지에서 더욱 성행했던 풍경 또한 현재와 매우 유사하다. 조선의 홍등가는 어디에 주로 밀집해 있었고,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곳에 머무는 여인들은 어떤 여인들이었을까?

조선 후기 화당(집창촌)이 밀집한 지역은 주로 청계천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농포안 (현재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에 새로운 상화당이 생기면서 두 지역의 구분을 위해 각각 북상화당, 남상화당이라 지칭했다. 지금의 명동 인근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요정 거리가 생겼고, 여기에서 주로 매음이 이뤄졌다. 그래픽 = 이진경 디자이너


꽃이 사는 집, 화당

중국에선 홍등가, 일본에선 유곽, 우리나라에선 (현재 기준) 집창촌으로 불리는 공간을 옛 선조들은 참 점잖게 일렀다. 꽃이 사는 집이란 뜻의 ‘화당’은 몸을 파는 삼패 기생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기생의 능력과 역할에 따라 등급을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누었다. 시서화 가무에 능한 예기를 일패, 이패는 그 아래등급으로 가무를 주로 하되 은근히 매음을 해 ‘은근짜’라 불렸고, 삼패는 외양은 기생이나 매음을 주로 하며 일패와 이패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어 행동했다. 이 삼패들이 사는 화당은 주로 한양 남부 시궁골과 갓우물골(현재 중구 입정동, 을지로3가)에 모여 있다 하여 불린 남상화당(南賞花堂)과 조선 말 새로 생겨나 종전의 상화당보다 북쪽인 한양 북부 농포안(현재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에 자리 잡은 북상화당(北賞花堂)이 있었다.

기생을 찾는 사내들이 모여드는 청루에서는 사소한 시비로 일어나는 주먹다짐이 빈번했다. 젊은 사내와 중년 남성의 격투가 무엇을 위해서였을지는 혜원의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사진 = <유곽쟁웅>, 신윤복, 지본채색, 18세기 말, 28.2*35.6cm, 간송미술관


법으로는 금지, 현실에선 자유?

조선시대 매춘은 법으로 금지된 행위였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을 법으로만 막을 수 있었으랴. 매음 기생이 모여 사는 청루를 제외하고 적을 두지 않은 매춘부들은 화랑유녀, 여사당패 등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한양의 기생이야 어려서부터 교방 또는 장악원에서 기예를 익혀 한 명의 예인으로 성장했으나, 멀리 지방의 관아에 속한 관기는 기예보다는 현감이나 관리의 수청 드는 일이 주 업무였다. 법으로는 매춘을 금했으나 현실에서 근절하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취한 일종의 편법이었던 셈. 앞서 언급한 함양 관기 연화의 사례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황성신문 1904년 4월 27일 자 3면에 실린 '娼女定區 창녀정구' 기사. 창녀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조정에서 이들의 거주지를 지정한다는 내용이다. 사진 = 한국언론진흥재단


퇴폐적 성풍조의 유입

조선 말 개항 이전까지는 관기를 통한 합법적 매춘, 사기를 통한 불법적 매춘만이 가능했다. 이러던 것이 갑오개혁 이후 어려운 생활에 매춘에 뛰어든 여성이 증가하며 정부 차원의 매춘여성의 거주지 제한 조치가 시급하게 되었다. 매춘 여성 증가로 주거지역에서도 암암리에 매음이 이뤄지자 황당한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

“요즈음 여항에 매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악습이 심한 까닭으로, 외국인이 때때로 시골집으로 가서 창녀 유무를 묻고 하여 거주민이 놀라 근심하기에 이르니...”

1904년 4월 27일 자 황성신문은 그 중 한 사건을 옮겨 적으며 이들의 거주지를 이전 공고를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무청은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 근처로” 이들의 거주지를 제한했다.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은 지금의 명동2가 지역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명치정이라 불렸는데, 일본식 과자를 판매하는 왜각시(게이샤)들을 구경하러 몰려든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지역으로 일본 상인들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과자나 요리와 함께 각시를 파는 요정을 세워 일본식 유곽문화를 도입했다.

대한제국 시절 궁중연회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관기(官妓)들의 모습. 사진 = 국립민속박물관


기생의 퇴락, 그리고 왜곡

종전의 기생은 학식이 높은 사대부를 손님으로 상대함에 따라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겸비해야 했다. 지역의 특색에 따라 읽고 읊는 책도 달라졌는데 유교적 학풍이 발달한 안동 기생은 대학을 암송하고, 관동 기생은 관동별곡을 읊었으며, 호방한 기풍이 강한 함흥 기생은 제갈량의 출사표를 노래하는 등 그 지적 수준이 양반 못지않았다. 개항 이후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사회, 경제 기반이 급격히 흔들리자 고고했던 기생의 지위도 함께 흔들렸음은 물론 생계수단을 잃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매춘에 나서기 시작했다. 종전에야 기생이 아닌 매춘여성(화랑유녀, 여사당패)은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도성 안에서의 매춘은 어려운 일이었으나, 국가의 근간이 무너지면서 때때로 기생도 몸을 팔고 매춘에 나선 일반 여성도 늘어남에 따라 정부는 이들을 한 지역으로 모아 거주지를 제한하고, 이 지역을 바탕으로 홍등가가 형성되었다.

삼패들이 모여 살던 남상화당(시동) (현재 중구 입정동, 을지로 3가) 인근의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현재 명동2가) 근처로 매음녀를 모여 살게 한 경무청은 이들의 이주 기간을 40일로 한정했는데, 이 바람에 인근의 초가집 값이 급등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높은 집값으로 인해 이곳에 이주한 여성들은 한 집에 5~7명이 함께 기거하며 대문에 ‘상화당’이란 문패를 써 붙이고 생활했다.

1890년 관기(官妓)제도가 없어지면서 일자리가 없어진 기생들은 이후 일본식 요정을 본 딴 명월관과 같은 요릿집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비슷한 시기 형성된 일본식 유곽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는 조선의 기생문화를 싸잡아 공창으로 간주하고 취급했고, 기생을 양성하던 교방의 명칭 또한 1914년엔 일본식인 권번으로 바뀌었다.

조국의 몰락은 기생들의 인생과 겹쳐 이들의 삶에 기구하게 투영되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성매매의 관점에서 조선시대 창기의 매음은 개인이 성을 파는 프리랜서의 개념이었다. 이들이 모여 있는 도성 안 청루나 음방에서도 그 접촉이 매우 은밀했고, 색주가(色酒家, 술과 함께 몸을 제공하는 작부)를 만나려면 남대문 밖 잰배(현재 중구 순화동)나 홍제원(현재 서대문구 홍제동)과 같은 도성 바깥을 직접 찾아야 했다. 본격적인 집창의 개념은 고종 갑오년 이후 늘어난 매춘인구에 따라 남상화당과 같은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가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1902년 관립의학교 교장 지석영은 이 같은 집창촌의 등장에 부쳐 “성병이 무서우니 각국의 법에 따라 기적(기생명부)를 편성하여 검미(檢微)할 것을 제창한다”고 제언했다. 집창촌의 등장과 함께 필연적으로 대두된 성병 문제는 이후 일제가 공창제로 기생을 관리하는데 좋은 구실로 작용했다. 이는 당대의 예술인이자 지식인으로 선망의 대상이던 기생의 몰락이자 추락이었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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