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총장이 욕먹는 게 인종차별 탓만일까

문정우 대기자 2016. 6. 18. 12:1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올해 말 퇴임을 앞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쓴 글을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사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워서였다.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에 대해서 쓸 때 빼고는 <이코노미스트>가 이처럼 냉정을 잃었던 적이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적어도 근래에는 없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유엔 역사 70년 동안 등장한 사무총장 8명 중 반 총장은 아둔하기 짝이 없는 최악의 인물이다. 그는 행정에서도 통치에서도 실패했다. 안쓰러울 만큼 눌변인 데다(그 유명한 반기문 영어를 이토록 폄하하다니!), 의전에 집착하며 자발성이 부족하고 깊이가 없다. 9년이나 현직에 있었는데도 헛발질을 한다. 그나마 오랫동안 그 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상임이사국들이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 봐줘야 재임 기간 중 내세울 일이라곤 여성 관련 기구를 통합한 것이라든가 파리기후협상을 잘 관리했다는 정도이다. 기사의 결론은 그러니까 다음번 총장은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 총장이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다는 기사만 접해왔던 이들은 놀랐을 것이다.

ⓒ한성원 그림 :

반기문 총장이 다분히 퇴임 후를 겨냥한 정치 행보를 한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5박6일간의 방한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가면서 ‘내 행동을 과대 해석하는 것을 좀 삼가·자제해주시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혼자 피식 웃었다. 적어도 반 총장 스스로 <이코노미스트>의 기사 중 한 가지만은 사실이라고 증명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가 보더라도 차기 대선 주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다가 돌아가면서 오해하지 말라는 것은 또 뭔가. 그는 유머가 있는지는 몰라도 깊이가 있는 사람 같지는 않다.

그의 행동을 차기 대선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이번 방한 때의 행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연초 박근혜 대통령과의 신년 통화에서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협상과 관련해 '박 대통령께서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이 평가할 것'이라며 비위를 맞췄다. 유엔 사무총장은 싫어도 전 세계 분쟁 현장에서 약자들, 특히 여성이 무참하게 희생되는 걸 무수히 지켜봐야만 하는 자리다. 정치적 야심이 없는 ‘정상적인’ 사무총장이었다면 누구보다도 희생자인 ‘위안부’ 할머니 본인들이 분개하는 이번 협상 결과에 대해 그렇게 경솔하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방한 기간에 박근혜 대통령은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아프리카를 방문 중이었다. 아프리카야말로 유엔의 주요 활동 무대이다. 반 총장은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새마을운동의 전도사 역을 자청해왔다. 그는 2008년 3월 유엔본부에서 열린 새천년개발목표 아프리카 주도 그룹 회의가 끝난 뒤 기자들이 한국에서 배울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성공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새마을운동도 그중 하나입니다.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한 우간다와 케냐, 그리고 순방 국가에서는 빠졌지만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이 반 총장의 충고를 받아들여 한국식 새마을운동을 벌이고 있는 나라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욕을 먹어가면서도 북핵 문제를 다루는, 일본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을 우회해 아프리카 3개국 순방에 나선 배경에서 반 총장의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동아프리카의 새마을운동 현장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박 대통령의 얼굴을 보면서 반 총장이 여권의 차기 대선 후보로 나서기로 작정했다는 게 정말인가 보다, 생각했다.

유엔과 유엔 사무총장, 그리고 반기문 총장에 대해 과대 해석이나 오해가 많은 것은 맞다. 광복 직후 신탁통치를 받느니 안 받느니 하면서 좌우익이 치열하게 치고받는 바람에 우리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유엔은 결정적으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거대한 존재로 다가왔다. 하지만 유엔이 대놓고 분쟁 당사자 중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든 것은 이례적이며, 어찌 보면 기적에 가깝다. 결정적으로 노르웨이 출신의 트뤼그베 할브단 리 초대 사무총장이 유엔의 감시하에 선거를 치러 세워진 정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시에는 아직 자유중국(현 타이완)이 상임이사국이었는데 그 점이 못내 못마땅했던 소련이 불참하는 바람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 파병안이 무사통과되었다.

강대국의 바람과는 달리 사무총장직에 권위를 심고자 했던 트뤼그베 할브단 리 총장은 유엔의 한국전쟁 참전 이후 소련의 눈 밖에 나서 두 번째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사실 인천 자유공원에는 군인으로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인 맥아더 장군보다는 리 초대 사무총장의 동상이 서 있어야 옳다. 그런데도 동상은커녕 대한민국에서 그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드물게 된 것은 아마도 그가 노르웨이의 노동운동가 출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유엔이 한국전쟁 때처럼 결정적인 활약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스웨덴 출신의 제2대 사무총장 다그 얄마르 앙네 칼 함마르셸드에 따르면 유엔은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옥에서 구하기 위해 존재한다. 거부권을 가진 강대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맞닿은 문제에서보다는 변방의 분쟁을 중재하거나 난민을 수습하는 데 훨씬 효과적인 기구다. 활동가들의 얘기를 빌리면 유엔은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백척간두에 선 사람들에게 이 작은 차이는 생과 사를 가름하는 힘을 갖는다.

유엔은 세계 평화와 인권 신장을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거의 유일한 도구이지만 너무 낡았다. 얼마 전 오랫동안 유엔에서 근무하다 정나미가 떨어져 퇴직한 고위 관료는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유엔이 실패한 조직이 되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에 따르면 평화 유지 예산은 어물어물 새나가고 새 인재를 보충하는 데는 200일이 넘게 걸린다. 지역 쿼터 인사는 경쟁력 저하와 부패를 불러들인다. 가난한 나라들은 유엔의 일자리를 자국의 실력자 주변인에게 선심 쓰는 국제 철밥통쯤으로 여긴다.

실력보다 운이 따라줘야 하는 유엔 사무총장 자리

유엔 평화유지군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나오는 유시진 대위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다. 현재 평화유지군 병력은 10만명, 작전 지역은 16군데에 달한다. 미국이 전체 예산의 4분의 1을 댄다. 한국을 포함한 톱10 국가가 80%를 낸다. 하지만 톱10 국가가 보낸 병력은 전체의 6%뿐이다.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에서 헬기가 추락해 자국 병사가 전사한 뒤 지상군을 거의 보내지 않는다. 현재 평화유지군은 대부분 르완다(6140명으로 가장 많다), 탄자니아, 파키스탄 등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 출신이다. 유엔은 이들 병사 1명당 1330달러를 지급하는데 가난한 나라에서는 짭짤한 수입원이다. 문제는 이들의 군기가 엄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곳곳에서 성추행과 무기 밀거래 같은 추문이 끊이지 않는다. 평화 유지의 상징이던 푸른 철모가 민간인의 기피 대상이 돼가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세계 정부의 대통령이니, 속세의 교황이니 하며 치켜세우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허한 면이 있다. 아무리 인류애가 뜨거워도 강대국 출신은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없다. 5개 상임이사국과 일본·독일·인도·브라질 등 큰 나라 출신까지 암묵적으로 사무총장이 될 수 없다.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유럽 등 4개 대륙 출신이 번갈아가며 맡는 게 관례이다. 첫 번째 임기를 마친 뒤 5개 상임이사국 가운데서 비토가 나오지 않는 한 대개 연임을 한다. 역대 8명의 사무총장 중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했던 이집트 출신의 부트로스 갈리를 제외한 전원이 연임했다. 이번에 아시아 출신인 반 총장이 10년을 했으니 다음에 아시아에서 총장이 나오려면 30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시아에 나라가 몇 개인가. 아마 다시 한국인 사무총장이 나오려면 10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는 장래 희망을 유엔 사무총장이라고 써내는 학생이 많다는데, 아이들은 아마 이런 사정을 모를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이 되려면 실력보다는 운이 많이 따라줘야 한다.

자격이 제한된다는 것은 권한의 한계 또한 뚜렷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카리스마가 있고 외교 역량이 뛰어난 사무총장이라 하더라도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은 숙명이다. 특히 미국이나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총장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초대 사무총장 트뤼그베 할브단 리는 유엔 사무총장직을 ‘세계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업’이라고 불렀다. 강대국에 맞서 독립성을 지켰으며 유엔 직원들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이는 2대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였다. 그는 헝가리 사태와 콩고 정정 불안 때 소련과 맞서 양보를 이끌어냈지만, 콩고 방문 중 의문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강대국과 맞섰던 모든 사무총장의 운명이 순탄치 못했다.

한국의 유엔 출입 기자들의 애국심이 지나쳐 덮여버리곤 했지만 반 총장에 대한 주요 외신의 평가는 일관성 있게 박했다. 취임하기 전부터 한국 정부(노무현 정부였다)의 로비가 노골적이었다는 점 때문에 눈총을 샀다. 첫 번째 임기 중반부터 ‘독재정권의 비위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소수의 한국인 직원에게 둘러싸여 내부 의견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한국인’이란 혹평이 쏟아졌다. 반 총장을 비난하는 대열에는 <이코노미스트>뿐만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포린 폴리시> 등 미국과 유럽의 유명 언론 및 외교 전문지가 총집결해 있을 정도다. 언론의 미움을 받기로 치면 결코 트럼프에 뒤지지 않을 수준이다.

반 총장은 대한민국의 처지에서는 천운이 따라 드물게 얻게 된 인재다. 경험에서나 명망에서나 대한민국을 돋보이게 하기에 손색이 없다. 대미·대일·대중·대러시아·대북한 관계에서 차마 외교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혼란만 거듭돼온 상황에서 그가 새로운 길을 열어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무엇보다도 세계 곳곳에서 인류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기후변화와 인종 분쟁, 자원 쟁탈 상황에 대한 안목을 키워온 사람이다. 하지만 분명 찜찜한 점이 있다. 그 많은 언론이 악담을 퍼부은 이면에는 과연 우리 언론이 애써 변호하듯 백인의 우월감과 인종차별 의식만이 있는 걸까. 트럼프와는 대조적으로 언행이 점잖은 그가 어째서 이렇게 험악한 얘기를 듣게 됐을까. 그를 검증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면 우선 그 이유부터 알고 싶다.

참고한 활자:<반기문, 나는 일하는 사무총장입니다>(김영사), <유엔 리포트> (21세기북스), <이코노미스트>, <워싱턴 포스트>

문정우 대기자 / woo@sisain.co.kr

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Live - [ 시사IN 구독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