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도심 절밥

김광일 논설위원 2016. 6. 1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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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 서울 성북동 가구박물관을 구경했다. 일행 다섯이 근처에서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누군가 길상사 점심 공양을 제안했다. 첨엔 뜨악했으나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가구박물관 모퉁이만 돌면 5분 거리였고 무엇보다 '공짜 밥' 아닌가. 일주문 지나 왼쪽으로 지장전 일층에 공양간이 있다. 스무 명 남짓한 줄 끝에 섰다. 참기름 두른 갖은 나물 담긴 스테인리스 양푼에 밥 한 주걱 받고 고추장도 한 숟가락 얹었다.

▶다들 달게 먹었다. 평소 밥알을 깨작거리던 이도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원산지가 의심스러운 육고기도, 마음 흩어놓는 향신료도 없어서일까. 먹자 골목 8000원짜리 음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벽에 '묵언(默言)'이라 적혀 있었지만 가망가망 수다 꽃을 피웠다. 어릴 적 온 식구가 바투 앉던 둥근 밥상도 떠올랐다. 어머니가 차려주던 집밥이 이러했던가. 그날 알싸했던 절밥 향내가 아직 혀끝에 맴도는데 어제 조선일보에 '절밥 먹는 강남 직장인' 기사가 실렸다.

▶마천루 숲으로 둘러싸인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 점심때면 직장인이 몰린다고 했다. 350석 공양간이 꽉 들어찬단다. 부근 사무실에서 온 사람도 하루 50~70명쯤이고 택배기사나 야쿠르트 아줌마, 환경미화원도 단골이라 했다. 보시함에 1000원을 넣기도 하지만 그냥 먹어도 된다. 도심 절밥을 찾는 이에겐 빠듯한 주머니 사정도 있겠으나 건강한 채식에 이끌렸을 법도 하다. 취나물 무침에 겉절이 김치와 김칫국을 안심하고 먹을 데가 어디 흔한가.

▶법보신문은 범어사 낙산사 봉은사 금선사 통도사 보원사 영평사 길상사를 공양간으로 소문난 사찰로 소개한 적이 있다. '열린 공양간'은 채소·나물을 뷔페처럼 차리거나 비빔밥이나 국수를 내놓는다. 불가에서 내가 닦은 공덕을 남에게 돌리면 회향(廻向)이다. 절집으로선 대중 공양만 한 회향이 없다. 식사를 마친 뒤 후원 솔숲을 걷는 힐링이 절집 디저트인 셈이다. 신자라면 부처님 얼굴을 뵙는 정화(精華)로 마음까지 씻고 나온다.

▶절밥은 전체식(全體食)이다. 밥알 하나 콩나물 꽁지 하나 안 버린다. 나물 데친 물로 국 끓이고 표고 불린 물로 찌갯거리 삶는다. 양평 묘적사에 템플 스테이 갔을 때 막내가 설거지까지 곧잘 해서 놀랐다. 책 '2016 대한민국 트렌드'는 '정서적 허기 때문에 집밖에서 집밥을 찾는다'고 했다. 절밥에서는 '건강' '탈속' '자비'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길상사 회주 법정은 세상 뜨셨지만 공양간 양푼에 그분 미소가 담긴 듯했으니, "여보시게 시주는 안 하고 공양만 하고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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