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여성혐오'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를 정확히 진단하고 있나?

박원경 기자 2016. 6. 1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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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싱크홀'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유행했다고 한 이유는 도로가 내려앉거나 도로에 구멍이 생기면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정확한 명칭을 붙이기보다는 의례 '싱크홀'이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입니다. (참고 : 싱크홀? 지반침하?…명명의 사회학)

그 결과,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싱크홀'과 부실 공사 등의 이유로 도심에서 발생하는 '지반침하', 그리고 객관적 현상을 설명하는 듯한 '땅 꺼짐' 등이 '싱크홀'이라는 용어 아래 모두 모였습니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 개념 과잉의 '싱크홀'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이후, 싱크홀은 줄어들었을까요?

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고 합니다. 언어화되지 않는 감정과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극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은 심대합니다. 그래서 유권자의 의식(사고)을 지배해 표를 가져오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은 언어(용어)에 집착합니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 그렇게 해서 어떤 프레임을 만드느냐는 유권자의 의식에 시나브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자신이 속한 정당이나 정파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법인세율을 올리는 것과 관련해 한 쪽에서는 '인상'이라는 표현을 쓰고, 한쪽에서는 '정상화'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 '여성혐오'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를 정확히 진단하고 있을까?

갑자기 싱크홀과 법인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여성혐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정확히는 여성혐오라고 불리는 사회적 분위기와 현상이 아니라 여성혐오라는 용어 그 자체입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혐오'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사건 직후에는 해당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냐에 초점에 맞춰졌다가 이후에는 성 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일부는 반발했습니다. 극우 성향사이트인 일베 뿐만이 아니라, 이번에는 평소 일베에 비판적이었던 곳에서도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다는 진단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평소 젠더적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생각되던 한 남성이 현재와 같은 진단에 반대했다가,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인 걸 보니 정말 여성혐오가 만연되어 있다"는 말과 함께 "너도 어쩔 수 없는 여성혐오주의자"라고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뭔가 평소와 다른 전선이 생겼습니다. 이 생경한 풍경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많은 남성들이 평소 가지고 있었지만, 밖으로는 표출되지 않았던 '여성혐오'주의적인 생각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들켜버린 걸까요?

● '여성혐오'라는 용어의 복합적 의미 그리고 불필요한 논란

사실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낯선 단어입니다. 지난해 IS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진 김 군과 관련된 소식이 알려진 이후 사용량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같은 '혐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동성애 혐오'만큼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포털 사이트나 게시판 등에 여성 혐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글이 많이 올라왔는데, 이것도 '여성 혐오'에 대한 낯섦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낯섦에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혐오'라는 용어가 가지는 복합적 의미도 한 몫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혐오의 사전적 의미는 '싫어하고 미워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통용되는 '여성혐오'는 여성 차별, 여성비하, 가부장적 분위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각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혐오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 익숙한 사람들과 확장된 의미로 '여성혐오'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 인지 부조화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겁니다. 사용하는 사람도 '여성혐오'에 대해 명확한 정의가 없어서인지, 글의 제목은 '여성혐오'인데 본문에 '여성차별'이라는 용어만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념 차이에 의한 이런 인지 부조화는 의례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말을 비틀어서 생각하면, 이미 특정한 사고를 규정하고 있는 언어가 다른 의미로 확장될 때, 즉 새로운 사고를 규정하려할 때는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우리 사회가 여성에가 폭력적이고 차별적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그런데 왜 그게 여성혐오냐" 는 등의 반발이 터져 나왔던 것도 '혐오'라는 용어에 대한 개념 차이에서 발생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자면 우려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기회가 이런 개념 차이에 의한 불필요한 논란으로 훼손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불필요한 논란에 대응하는 사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해 쏟아야하는 동력을 소진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입니다. 또, 다양한 의미를 포함해 쓰이는 '여성혐오'라는 용어가 진짜 '여성혐오'에 대한 인식을 흐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 개념 과잉을 걷어낸 명확한 딱지 붙이기와 그것을 위한 사회적 논의

최근 공화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도널드 트럼프는 경선 TV 토론에서 자신을 몰아붙인 여성 진행자에게 온갖 막말을 쏟아냈습니다. "눈이랑 다른 어디에서도 피가 나오고 있었다"고 말하거나,  외모적으로 매력적이지만 멍청한 여성을 지칭하는 'bimbo'라는 용어를 공공연히 사용했습니다. 이런 트럼프에게 '여성혐오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굳이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아가서 사람들의 추모를 조롱한 사람들에게도 '여성혐오'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는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아이는 여자가 키워야 된다", "남자들도 역차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요? 이들에게 '여성혐오'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그들을 정확히 진단하는 걸까요? 이런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왜 분노하고 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심하기는 합니다만, 트럼프나 일베 네티즌과 같이 '여성혐오'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효과적일까요? 그냥 "당신은 성 차별주의자다"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들에게 트럼프나 일베 네티즌 등에게 붙인 '여성혐오'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트럼프류의 진짜 '여성혐오'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는 것은 아닐까요?

여성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소수자(약자)라는 말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에 유효합니다. 여성들에게 "세상이 험하니 조심하라"거나, "여자가 말이야"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우리사회는 여성에게 위험하고, 차별적입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누려온 남성부터 반성하고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불필요한 논란은 막으면서도 사회를 정확히 진단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아닐까요? 왜곡된 사회 현상을, 그리고 사회 분위기를, 그리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로 규정한다면 변화를 이끌어 내기가 더 용이하지 않을까요? 일반적으로 용어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때 용어의 힘은 더 커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성혐오'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을까요? 여성혐오는 여성차별, 여성비하 등을 포함하는 개념인지, 아니면 층위가 달라 구분해서 써야하는 것인지. 더 근본적으로 여성혐오라는 용어는 여성차별적인 사회를 진단하고 표현하는 적절한 용어인지. 왜 '증오'가 아닌 '혐오'가 강남역 살인 사건을 설명하는 용어로 소환된 것인지. 이런 부분에 대한 논의를 하고 '여성혐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여성혐오'라는 용어가 가지는 힘은 더 커졌을 것 같은데, 우리 사회는 이 부분을 건너뛰고 '여성혐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언론도 여기서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재작년 여성단체연합이 펴낸 '온라인상의 여성혐오 모니터링 보고서'는 '여성혐오'라는 용어에 대해 '이 단어의 역사적 맥락, 그리고 사용되는 문화권의 맥락에 따라 정의가 달라질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진단 역시 복합적일 수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성혐오'라는 용어를 보고서 제목으로 사용한 사람들도 우리 사회에서 이 단어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해야할 지 조심스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필요한 논란을 막고, 일베류와 그 이외를 분리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여성 혐오와 여성 차별(성차별) 등은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그것이 차별적인 우리 사회를 바꾼다는 목적을 실현시키는데 효과적일지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복합적 개념의 '여성혐오'라는 용어 사용이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논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불필요한 논란으로 사회 변화를 위한 동력이 소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여성혐오'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원경 기자seagu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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