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나무야 나무야]비비추 이야기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2016. 6. 1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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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계절로 여름이 된 지 오래지만, 짧아진 봄이 너무도 아쉬워 마음으로는 미루어 두었던 여름을 이제는 제대로 맞이해야 되나 싶다. 여름을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꽃이 바로 비비추이다. 반쯤 볕이 드는 나무그늘 아래 싱그럽게 잎을 펼쳐내 지면을 덮고, 여름이면 꽃대를 올려 작은 나팔 같은 보랏빛 꽃송이들을 줄줄이 피워낼 비비추 꽃무리들을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맑아지는 듯하다.

비비추란 이름이 참 곱다. 어느 문헌에도 이름의 유래가 기록되지 않아 항상 궁금했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제법 그럴듯한 설명이 있다. 잎이 꼬여서 ‘비비’, 어린 잎을 먹을 수 있으니 취나물의 ‘취’에서 ‘추’로 바뀌어 비비추가 되었단다. 돌돌 말려 올라온 새싹이 풀어지듯 펼쳐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꽃사진 작가 김정명 선생님은 비비추에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작은 새들이 “비비추 비비추” 우는 듯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마음의 귀를 열고 그 꽃들을 보면 절로 입가에 행복이 머문다.

우리나라에는 비비추 말고도 일월비비추, 흑산도비비추, 좀비비추 등이 자란다. 이러한 ‘비비추 집안’을 통틀어 부르는 속명(屬名)은 ‘호스타(Hosta)’라고 한다. 대부분의 비비추는 연한 보라색 꽃이 피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흰꽃의 옥잠화도 비비추 집안에 속한다. 정원문화가 발달한 서양에서는 장미, 아이리스, 원추리 같은 품종들이 오래도록 인기가 있었다. 한동안 비비추 정원이 유행처럼 번졌고 수많은 품종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현재는 세계적으로 2500종류가 넘는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혹시 비비추란 이름을 처음 들으셨을지 모르겠다. 아마 사진을 보면 “아하, 이 꽃!”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공원이나 학교, 아파트, 가로화단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우리 꽃이기 때문이다. 산에서는 야생화가 곱고 좋으나 가까이 두기에는 까다롭고 어렵다는 이들이 많은데, 비비추는 도시로 내려와 성공한 대표적인 야생화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택식물원, 고은식물원 같은 곳에 가면 다양한 잎모양을 한 비비추속 식구들을 구경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수천의 품종을 만들어 내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비비추 집안 식물들은 자생지가 서양이 아니라 동아시아 특산 식물이라는 점이다. 한국, 일본, 중국 등에 35종류의 자생종이 있는데, 이들을 부모로 삼아 육종돼 수천종의 품종이 만들어진 것이다. 기록을 더듬어 보면 1784년에서 1789년에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였던 엥겔베르트 캄퍼(Engelbert Kampfer)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머물며 그린 두 종의 그림으로 알려졌고, 그즈음 마카오에 있던 프랑스 총독이 파리로 보낸 종자가 최초로 서양에 보내진 것이다. 본격적으로 원예종들이 개량된 것은 1900년대 후반이다.

나도 이와 관련한 씁쓸한 기억이 있다. 10여년 전 전문가 몇 분과 흑산도에 조사를 갔다가 폭풍을 만나 섬에 며칠 갇히게 됐다. 조사는 다 끝났고, 며칠 배가 뜨기를 기다리며 이 구석 저 구석 식물 구경을 하다 특별한 비비추 종류를 발견했다. 꽃이 크고, 깊이 갈라졌으며 사방으로 돌려나고 특히 반질반질 광택이 나는 잎이 아름답고 특색이 있었다. 한번도 국내 식물도감에서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나도 드디어 신종을 찾아냈구나” 싶어 흥분했다.

흑산도에서 돌아와 학술적으로 정리해 발표하려다 보니 이미 발표한 외국인이 있었다. 베리 잉거라는 아시아 담당 식물 전문가였다.

이 식물의 학명은 그의 이름을 기려 호스타 잉게리(Hosta yingeri)라고 명명돼 있었다. 오래전 우리가 현대적 의미의 식물학에 눈을 뜨기 전, 외국인들에 의해 흘러나간 많은 구상나무 같은 식물자원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깊은 섬 구석에서 자라고 있던 식물까지 외국에 나간 것이 얼마나 안타깝던지…. 선진국의 자원 탐사가 얼마나 철저한지 뼛속까지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식물의 우리말 이름은 ‘흑산도비비추’이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주는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이종석 서울여대 명예교수가 20여년간 연구해온 100여 종류의 비비추 품종과 각 지역의 다양한 변이를 가진 자생종들을 국립수목원에 기증한 것이다. 3년간 이들을 증식하고, 전시원을 설계해 족보를 가진 비비추 전문 전시원(영어 이름은 이 교수의 뜻을 기려 Lee’s Hosta Gallery로 지었다)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는 흑산도비비추를 개량한 ‘홍도’ ‘은하’ 같은 우리 이름을 가진 품종도 포함돼 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건만 가지각색의 잎모양과 색깔을 가진 비비추 품종들은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 냈다. 비비추 식구들은 전국의 연구자와 재배가들에게 제공돼 새로운 우리 품종을 만드는 재료가 된 뒤 증식돼 곳곳에 있는 비비추 정원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어진 공간들은 새로운 우리꽃 명소로 거듭날 것이다. 진정한 6차 산업의 실현이다.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은 우리나라 종을 가려내는 분류학자, 멋진 정원을 설계하는 조경가, 증식센터에서 땀 흘리며 키워낸 재배가 등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수고한 덕분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평생의 연구성과를 국가에 기증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평생의 업적이 영원한 업적으로 남을 ‘기증’의 의미를 알고 실천한 분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이제 비비추의 계절이 돌아온다. 꽃 구경과 더불어 꽃보다 아름다운 잎 구경 한번 하시길….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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