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석양의 신전 앞에서 '보르트'에 젖다

2016. 6. 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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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8일 수요일 맑음. 숱한 고지.#211 Eduardo Bort 'Cuadros de Tristeza'(1974년)
[동아일보]
스페인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가 에두아르도 보르트의 1집 앨범 표지.
어쩌면 음악의 예수일지도 몰랐다. 석양을 등지고 연주하는 그 악사.
이름 모를 그가 바닥에 열어 놓은 트럼펫 케이스를 향해 주머니에 있는 모든 동전을 조심스레 던졌다. 총 17센트(약 224원)였다.

적은 금액이나마 버스커에게 돈을 줘 본 건 처음이었다. 시답잖은 비평이나 해 봤지. 문득 돌아보니 난 클린트 이스트우드조차 난감해하며 배역을 고사할 정도의 무정한 캐릭터였다, 가끔.

어제 저녁 마드리드 시내 서쪽, 왕궁 근처의 언덕에 자리한 데보드 신전에 간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히로니뮈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을 굳이 보겠다고 지체하지만 않았다면 난 세고비아행 마지막 버스를 탔을 테고 그랬다면 망연자실 정처 없이 걷다 문득 눈에 띈 이 알 수 없는 신전 같은 데 올라올 일도 없었을 거다.

알고 보니 데보드 신전은 내 처지와 비슷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이집트 나일 강변에 서있어야 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신전이 침수 위기에 처하자 이집트 정부는 우방인 스페인에 신전을 통째 기증하기로 한다. 데보드는 그래서 이집트 밖에 있는 유일한 이집트 신전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고대의 돌무더기와 분수, 먼 산 위에서 흘러온 보랏빛 햇살을 받은 스페인 왕궁의 조합은 요 며칠 미술관에서 본 그림들처럼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

마침 내 이어폰에서는 스페인의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가 에두아르도 보르트의 괴팍하면서 서정적인 음악이 흘렀다. 그날 낮 숙소 근처 중고 음반 가게에 들렀다 주인장한테 추천받아 덜컥 구입한 앨범.

음반 표지의 보르트는 이름처럼 그저 보통 사람 같다.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가부좌 튼 채 기타 들고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그. 허름한 연갈색 면바지에 기타는 통기타다. 무엄하다. 적어도 우주쯤 배경으로 깔 적엔 우주적 의상쯤은 갖춰 줘야 하는걸. 안 그래서 그는 더 도인 같다.

보르트의 1집(1974년)은 이쪽 장르 마니아들 사이에서 숨은 명반으로 꼽힌다. 오르간, 멜로트론, 로즈 피아노의 꿈결 같은 음색, 소용돌이치는 밴드 사운드의 능선 위로 문득 치솟는 뜨거운 멜로디…. 무명의 트럼페터가 황혼의 신전 앞에서 부는 멜로디가 이어폰 속 보르트의 연주와 문득 겹쳐 들렸다. 비밀스러운 협연. 태양은 꿈의 세계를 향해 갔다.

‘그녀의 얼굴은 죽은 잔디 같지/절대로 미소 짓지 않아/그녀의 눈은 얼어붙은 잔과 같지/때로 울기도 하고… 슬픈 마리아, 당신은…’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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