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투 문장, 새로운 문체의 실험으로 볼 수 있다

권영미 기자 2016. 6. 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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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투는 '한국어 표현력의 확장' vs '제국주의적 문학관'의 일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AFP PHOTO/IVAN GIMENEZ / TASQUETS EDITORES=News1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번역투'를 자신의 독특한 색깔로 삼는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대체로 '한 국가 고유의 말과 글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비판받아온 '번역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강해지고 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최근 출간된 자신의 에세이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집필 당시 일부러 영어 번역투의 문체를 채택했다고 고백했다. 국내 작품에서도 번역투의 문체가 점점 더 늘어나면서 문체 실험의 일부로 번역투를 보는 입장도 점점 국내에서도 힘을 얻고 있다.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에서 데뷔작 '바람의…'가 일본어로 쓰고 보니 너무 밋밋하고 재미없게 느껴져서 영어로 번역한 후 다시 일본어로 번역해 얻은 '번역투' 문체로 쓴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모국어인 일본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수식이 배제되었고 '뉴트럴'(neutral)하고 활동성이 뛰어난 문체가 획득되었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번역투 문체를 구사하는 국내 작가로는 김연수, 편혜영, 배수아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김연수는 영문 소설을 한국어로 옮긴 듯한 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체를 보여준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을 번역하기도 한 그는 수년전 한 문예지에 실린 글에서 '한국어는 영어보다 감정적 표현에 매우 뛰어나고 영어는 사실적 표현에 적합한 언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나는 번역 가능성을 떠나서 한국 소설의 문장이 사실적 표현을 지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문체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소설가인 편혜영이나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소설가 배수아 역시 '무국적' 문체를 보여준다. 편혜영은 주인공 이름과 배경 장소를 자주 익명 처리하고 '그'나 '그녀' 같은 인칭대명사도 흔히 쓴다.

배수아 역시 번역투이면서 '이방인스러운' 느낌의 문체를 구사한다. 배수아의 작품은 한강의 소설을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가 번역중이다.

소설가 이문열 역시 한 인터뷰에서 해외번역되어 소개될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고 밝힌 바 있다. 이문열은 한학에 정통한 작가답게 한문투, 고어투의 유장한 문체도 구사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번역투는 '한국어 표현력의 확장' vs '제국주의 팽창'의 일부

번역투 문체에 대해서는 한국어 표현력이 확장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 예전에 비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박일환 시인은 "예전에는 이오덕 선생님의 입장을 엄격하게 따랐지만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에 현재는 번역투가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도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한국의 멋과 아름다움을 담고 표현의 정확성이 확보된 바탕 위에서 번역투가 시도되어야 한다"며 선을 그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는 "번역투도 일단은 새로운 문체의 하나로 볼 수 있지만 문체에 대한 실험의식을 갖고 쓴 것이냐 아니면 언어에 서툴러서 번역투가 나온 것이냐가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체를 실험하는 것이 작가의 권리이며 번역투가 언어의 확장은 물론 생각의 틀 확장에 기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루키는 책에서 "내 문체가 '일본어에 대한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하지만 언어란 누가 어떻게 거칠게 다루든 그 자율성이 훼손되기 힘든 강인한 것이며 그 유효성의 폭을 가능한 한 넓혀가는 것은 작가에게 주어진 권리"라고 말했다.

노승영 번역가는 '번역투가 독특한 문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기존 한국어 문법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묘사를 번역할 때 한국어로는 어색하지만 생경한 표현을 쓸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면서 "독자가 이를 한국어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식으로 해석하면 한국어 표현력이 확장될 수 있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노승영 번역가는 "생각이란 것이 한국어 틀에 얽매어 있는 경우가 많아 번역투를 쓰는 것이 색다른 사고틀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일부 작가들은 새로운 문체의 시도가 결국 영어나 일본어 등 강대국 언어의 번역투인 점이 우려스럽다는 의견을 내놨다. 한 소설가는 "점점 영어나 일어 번역투가 더 세련된 느낌을 주고 순우리말을 쓰는 게 촌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팽창과 맞물려 있는 듯하다"고 진단했다.

케냐 출신 소설가인 응구기 와 시옹오는 '제국주의적 문학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영어가 아닌 모국어인 기쿠유어로만 작품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제3세계에서 영어 쓰지 않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운동이 '영어를 둘러싼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아프리카의 경험을 세계관의 중심에 놓자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세계화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거나 언어 실험을 해보는 것이 단순히 언어적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시사한다.

케냐 소설가 응구기 와 시옹오© AFP=News1

unga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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