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김성수 전 진실화해위 국제협력 팀장 “정당하다고 믿으면 하느님과도 겨뤄야” - 주간경향
김성수 전 진실화해위 국제협력 팀장 “정당하다고 믿으면 하느님과도 겨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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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묘역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느냐, 제창하느냐를 놓고 한창 논란을 벌일 때인 4월 28일, 대법원은 한 ‘의미 있는’ 판결을 내렸다. 무려 6년이나 끈 재판이었다. 그런데 그 오랜 심리는 영문 번역이 정확했느냐를 따지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왜 대법원이 뜬금없이 영문 번역의 오류를 따지게 됐을까.

그러나 이 재판의 숨은 본질은 ‘광주민주화운동’이냐 ‘광주민중반란’이냐를 규정하는 일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논란이 정부의 공식기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안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진실을 따지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 공식기관 안에서 이런 논란으로 소송까지 벌어진 것은 이례적이고 불행한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피고 이영조 진실화해위 위원장과 원고 김성수 국제협력팀장의 이 재판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려던 정권의 부도덕성에 맞선 작은 시민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영문 보고서 만들어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는 왜곡된 역사적 진실을 다시 밝히고 맺힌 한을 풀어줬다. 초대 송기인 위원장, 2대 안병욱 위원장까지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9년 12월 이 위원장이 취임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이 위원장이 활동하던 ‘바른사회시민회의’라는 단체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반대하고 언론시민운동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보수를 넘어 극우적 활동을 했다. 특히 현행 역사교과서가 급진적 교수들에 의해 왜곡됐다고 주장해 국정화 분위기를 주도했다.

김성수씨가 진실화해위에서 해직되고 한국투명성기구에서 활동하던 2012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참여연대 등과 함께 국정원 대선개입 항의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 김성수 제공

김성수씨가 진실화해위에서 해직되고 한국투명성기구에서 활동하던 2012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참여연대 등과 함께 국정원 대선개입 항의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 김성수 제공

이런 활동을 하던 이 위원장은 취임하자마자 진실화해위가 발간한 영문보고서인 ‘Truth and Reconciliation’(진실과 화해) 배포 중단 지시를 내렸다. 전임 위원장 시절 만들어져 아무 문제 없이 배포했던 보고서였다. 이 영문보고서를 만든 사람이 바로 김성수 국제협력팀장이다.

당연히 내부에서 논란이 일었다. 이 위원장은 직장협의회와 언론 인터뷰에서 ‘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유일한 영문 책자로 해외에 내보이는 위원회의 얼굴인데 문법, 구문상의 오류,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엉망이었다’고 배포 중단 이유를 밝혔다. 김씨에게 문법이 엉망인 영문보고서를 만들었다는 ‘모욕적인 혐의’가 씌워진 것이다.

재판 끝에 “번역에 문제 없다” 판결 받아
이에 항의하는 김씨는 곧 인사조치됐고, 4개월 후인 2010년 4월 계약만료를 이유로 해임됐다.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5년간 아무 문제 없이 일하던 국가공무원직에서 해직된 것이다. 김씨를 비롯해 번역에 참여한 3명은 2010년 5월 ‘번역·감수자의 명예를 훼손한 점’을 들어 각각 2000만원씩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약 6년간의 오랜 재판 끝에 대법원으로부터 ‘번역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사실 쟁점이 싱거울 정도로 없었다. 이영조 측에서 ‘영어가 엉터리’라는 주장을 증거물로 법정에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영조는 번역이 엉망이라고 주장했다가 2심 때는 다시 해당 언론의 오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왜 정정보도 요청을 안 했나?’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했다.”(현재 영국에 있는 김씨와 인터뷰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이뤄졌다)

사실 이 사건의 숨은 진실은 영어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진실에 관한 문제였다. 김씨는 “배포를 금지시킨 영문책자에는 안병욱 전 위원장이 직접 쓴 ‘한국 과거사 정리의 역사적 배경’ 이란 글이 있다”면서 “안 전 위원장은 일제강점기와 군부 독재정권을 ‘억압의 현대사’로 서술하고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는데, 이는 이영조의 뉴라이트 시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의 역사인식 ‘본색’은 곧 드러났다. 그는 2010년 11월 5일 미국에서 열린 ‘한국 과거사 정리의 성과와 의의’라는 주제의 국제심포지엄 발표문에서 정부 공식 용어인 ‘광주민주화운동’(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을 쓰지 않고 광주에서 발생한 ‘민중반란’(a popular revolt)이라고 표현했다. 또 제주 4·3은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으로 표시했다. ‘민중반란’이라는 표현은 일베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세력, 혹은 일부 극우적 인사만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이 위원장은 영문 발표문만 배포하고, 국문 발표문은 배포하지 않았다.

“민주사회에서 학자들은 역사에 대해 자유스럽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영조씨는 개인 또는 학자 신분으로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것이 아니라, 과거사 정리 기관의 수장인 공무원 신분으로 세계인들에게 발표한 것이다. 게다가 진실화해위는 역사의 피해자를 배려하기 위한 기관이다. 이는 공직자로서 자격에 돌이킬 수 없는 결격사유라고 생각한다.”

김성수씨가 저술한 <함석헌 평전> 표지.

김성수씨가 저술한 <함석헌 평전> 표지.

이영조 위원장의 기본적 역사 인식은 어떤 것인가.
“진실화해위의 원조 격인 반민특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전임 안 위원장과 극명히 구분된다. 배포를 금지했던 영문보고서에 전 안 위원장은 ‘이승만 정부는 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였고 끝내 해체했다. 그로 인해 일제 침략에 협조하였던 인사들은 처벌받기보다는 이승만 정권뿐만이 아니라 그 후 군사정권하에서도 권력을 가지고 큰 영향을 행사했다’라고 돼 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이승만이 평생 독립운동 지도자로 살아왔다는 점과 철두철미한 반일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경멸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미루어볼 때,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 승인을 거부한 것은 어떤 공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국가기반 건설의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판단된다’라고 발표했다. 어느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가.”

진실화해위는 역사의 피해자 입장에서 진실을 가리고, 억울함을 신원하자는 기관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이영조씨는 역사의 피해자를 모욕하고, 가해자 편의 시각을 가졌다. 2010년 7월 23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도 성명서에서 전임 안 위원장은 ‘미군의 폭격이 필요했다 해도 민간인 안전조처도 없이 폭격한 것은 국제인도법과 전쟁법을 위반했기에 미국은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고 밝힌 반면, 이영조는 ‘군사 작전상 긴박한 필요 여부가 판단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고의·불법성이 입증되지 않아 미군 폭격은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그래서 유족회로부터 ‘이 위원장의 부모와 온 가족이 미군 폭격에 의해 몰살당했다면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올 법이나 하겠는가’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2010년 12월 31일 활동을 종료하고, 마지막 보고서를 냈다. 마지막 보고서도 이런 기조로 기록돼 있는가.
“그렇다. 그래서 조사관들은 이영조 위원장 체제의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인정할 수 없다고 따로 ‘조사관 백서’를 기록했다. 그 중 일부가 <오마이뉴스>에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라는 제목으로 14회에 걸쳐서 연재됐다. 조사관들은 ‘진실은 승자의 전리품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정부 장관급 위원장과 일개 계약직 팀장 출신의 보통사람이 역사인식을 놓고 재판을 벌이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그의 변호사는 변론 도중 ‘수임제한 위반’이라는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기도 했다. 변호사의 구속 사태로 법조계에서는 표적수사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씨는 “미국인 감수자조차 이영조나 정권에게 보복을 당할까 두렵다고 3명 중 1명만 소송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 19대 총선에서 여당 공천을 신청하는 등 ‘정치지향적 인물’임이 드러났고, 최근 남경필 경기지사에 의해 경기연구원 이사로 선임됐다.

김씨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국립 철도대학을 나와 기관사로 근무했다. 공무원 생활을 하던 그는 1979년 함석헌 선생의 강연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함석헌 선생은 기독교의 한 종파인 퀘이커(종교친우회)교(敎) 신도로,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가로, 독재시대에는 민주화운동가로 한평생을 보낸 분이다. 그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유명한 말과 <씨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며 사상가·역사가·민중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2006년 진실화해위 근무 시절 김성수씨 가족이 한명숙 총리 공관에 초청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사진 왼쪽) 김성수씨가 영국에서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사진 오른쪽) / 김성수 제공

2006년 진실화해위 근무 시절 김성수씨 가족이 한명숙 총리 공관에 초청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사진 왼쪽) 김성수씨가 영국에서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사진 오른쪽) / 김성수 제공

<함석헌 평전> 국문·영문판 출간
김씨는 1989년 2월 4일 새벽, 함석헌 선생의 부음을 듣고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그는 “함석헌 선생의 시신을 보고 마치 나 자신이 그 관 속에 누워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병원 영안실을 나온 그는 그 길로 사표를 제출해 8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함석헌 선생이 평생 믿었던 퀘이커교의 본산인 영국으로 떠났다. 그는 1992년 영국 에섹스대학교에서 학사논문으로 ‘함석헌과 한국의 민주주의’, 1994년 석사논문으로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 이해’를 차례로 쓰고, 1998년 영국 셰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0년간의 영국 유학을 마치고 2000년 귀국 한 그는 2001년 국문판과 영문판 <함석헌 평전>을 출간했다. 그리고 정부 차원에서 역사재평가 작업이 이뤄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거쳐 진실화해위원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역사의 진실을 찾고 피해자를 어루만지는 일은 역사학도로서, 함석헌 선생을 신봉하는 그로서 매우 보람찬 일이었다.

사실 함석헌 선생처럼 퀘이커교도가 그렇지만 그는 매우 순진하고, 소박한 사람이다. 그는 ‘운명적’으로 함석헌 선생을 만난 후 달라진 자신의 변화를 “철도기관사에서 역사가로, 근본주의자에서 보편주의자로, 복음주의자에서 인본주의자로, 교조주의자에서 낭만주의자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여기에 그가 빠트린 것을 하나 추가한다면 부당한 세력에 맞서는 용기다. 함석헌 선생도 평생 일제·독재와 싸웠다. 그는 유신시대 최고령(75세) 구속자였다. 김씨가 실세 ‘뉴라이트’ 세력과 장관급 위원장에 맞설 수 있던 용기도 바로 함석헌 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함석헌이 말했듯이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으면 절대자 하느님과도 겨뤄야 한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에서 해직된 그는 반부패 시민단체 활동을 하다 처가가 있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유학 중 만난 영국 출신의 아내 앤 엘리자베스 김과 자녀(1남1녀)가 있다. 그의 아내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그리스·라틴 고전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셰필드대학에서 일본문학 석사·박사학위를 준비하다 김씨를 만나 결혼해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해직기간 동안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고 한 번도 잔소리하지 않은 아내가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혼혈이라 학교에서 놀림을 당해 힘들어 하던 아이들 때문에 2년 반 전 영국으로 가 시골마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향후 정권이 바뀌고 진실화해위 같은 기구가 다시 생기면 국제협력과 국제홍보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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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살아갈 미래
오늘을 생각한다
가까스로 살아갈 미래
여름마다 바닷물이 미지근하다. 40년 전, 30년 전, 20년 전 그리고 2015년 딸이 태어나기 직전의 제주 바다를 전부 기억하는 나에게 바닷물이 따뜻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닷속 한가득 일렁이며, 어린 다리를 휘감던 무성한 해조숲은 벌써 사라졌다. 시커먼 현무암 바위 위에 짙푸른 해조숲이 펼쳐져 있고, 전복이며 소라며 어린 물살이가 우글우글 살아 숨 쉬던 풍경은 이제 기억 속에만 남았다. 엽상바닷말(다시마·미역 등 잎과 줄기가 구분되는 해조류)이 사라진 자리에 칙칙한 잿빛 물질(무절석회조류)이 바위에 들러붙어, 현(玄)무암은 회(灰)무암 꼴이 됐다. 사막이 된 바다, 이를 백화현상 또는 갯녹음현상이라 한다. 갯녹음의 원인은 크게 수온 상승과 환경 오염이다.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안은 최근 40년간(1971~2010) 수온이 1.14℃ 상승해 전 세계 평균에 비해 약 3배 이상의 상승 속도를 보인다. 지구온난화로 해수 온도가 급상승하고, 바다숲이 황폐화하고, 그린 카본(숲과 같은 육상 생태계가 흡수하는 탄소)보다 탄소 포집 속도가 50배 빠른 블루 카본(해조류나 염습지 같은 해양생태계가 흡수하는 탄소)이 급감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 한국 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