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채 팔아 석유 받고..사우디는 '왕실 후원' 얻고

정환보 기자 입력 2016. 5. 31. 22:40 수정 2016. 6. 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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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미·사우디, 42년 만에 ‘숨겨진 밀약’ 증거 드러나
ㆍ외교전문·당시 참여자 인용…블룸버그 ‘1974년 협상’ 보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숨겨진 밀약이 42년 만에 세상에 알려졌다. 1970년대 오일쇼크 직후, 사우디가 넘쳐나는 오일달러로 미국 국채를 사들여 미국 재정을 받쳐주기로 미 정부와 사우디 왕실이 밀실 협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사우디 석유를 들여오면서 오히려 달러를 거둬들이는 희한한 거래로 이득을 챙겼다. 사우디는 이 협상 자체를 비밀에 부치는 대신 미국 무기를 사들이고, 미국을 왕실의 후원자로 묶어두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협상이었다.

블룸버그통신은 31일(현지시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있는 외교전문과 1974년 협상에 참여한 제럴드 파스키 전 재무장관 보좌관의 말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미국은 안전보장을 해주고 사우디는 돈을 댄다는, 두 나라의 긴밀한 관계는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밀약이 있었음이 문서와 증언으로 드러난 것은 처음이다.

협상은 1974년 7월 윌리엄 사이먼 당시 미 재무장관이 유럽·중동 출장 중 사우디 제다에 나흘간 머무는 사이에 이뤄졌다. 외부에는 의례적인 외교순방이라고 했으나 사이먼에게는 사우디 왕실을 설득해 미 국채를 사들이겠다는 확답을 받아내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빈손으로 돌아올 생각을 아예 말라”고 할 정도였고 협상단도 죽기살기로 임했다고 파스키는 전했다.

당시는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사우디 등 아랍 산유국들이 원유 생산량을 급격히 줄인 1차 오일쇼크 직후였다. 미국의 의도는 비밀 협상으로 이 시기 미국 경제를 급속히 위축시킨 재정위기를 타개하는 동시에, 소련으로 향할지 모르는 오일머니의 흐름을 막는 데 있었다. 사우디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졌다. 왕실은 겉으로는 아랍의 맏형을 자처하면서, 이면에서는 미국과 몰래 손잡고 돈을 대주며 ‘보험’을 들었던 것이다. 협상은 성공적이었고, 두 나라의 밀월관계는 40년 이상 유지됐다.

그러나 미국과 사우디의 공생관계는 최근 깨지고 있다. 미국이 이란과의 화해에 적극 나서자 사우디는 미국 국채를 매각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기름값이 떨어져 사우디가 재정난을 맞은 것도 한 요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우디가 보유한 미국 국채 문제가 미 정치권의 이슈가 됐다. 블룸버그는 미 재무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한 결과 3월 현재 사우디의 미 국채 보유액이 1168억달러(약 139조원)에 이른다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사우디가 가진 미국 국채 규모가 공개된 건 사상 처음이다.

17일에는 9·11 테러 희생자 가족들이 사우디 왕실을 고소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미 상원이 통과시켰다. 백악관은 사우디와의 관계가 더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진 양국 관계를 봉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환보 기자 botox@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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