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기념비가 될 '그 화요일 강남역'

천관율 기자 입력 2016. 5. 31. 18:58 수정 2016. 5. 3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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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성이 있었다. 그는 정신질환을 앓았고, 여자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며 분노에 차 있었다. 그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방식으로 ‘복수’했다. 사건이 벌어지자 주류 미디어는 한 정신이상자의 일탈로 보도했다. 세상은 정상인과 미치광이의 세계로 칼같이 나뉘어 있어서, 정신이상자의 소행으로 확인된 순간 정상인의 세계에서는 문제가 사라진다는 듯이 썼다.

여성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상적인 공포에 시달리고 심하면 살해당한다고 느꼈다. 항의의 물결이 일어났다. 트위터에서 가장 많이 쓰인 해시태그 '여자들은 다 겪는다'를 단 게시글이 50만 건을 넘겼다. 남자들은 항변했다.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 비정상적인 일탈 사례를 일반화한다.' 어느 여성이 답했다. '모든 남자가 다 여성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게 요점이다.'

ⓒ강남역10번출구 페이스북 : 극우 커뮤니티 ‘일베’ 일부 회원은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물결을 조롱하는 조화를 보냈다.

이것은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이 사건의 이름은 샌타바버라 총기난사 사건. 2014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타바버라 카운티 아일라비스타에서 22세 청년 엘리엇 로저가 칼과 총으로 남자 3명과 여자 3명을 죽이고 13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한 사건이다. 로저는 범행 전날 촬영해 유튜브에 올린 영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22세이고 대학을 2년 반 다녔지만 여전히 동정이다. 대학은 모두가 섹스와 쾌락을 경험하는 곳인데 나는 외로움에 썩어야 했다. 여자들은 내게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이건 불의이며 범죄다. 나는 완벽한 남자인데 너희는 나 같은 최고의 신사를 두고 다른 불쾌한 남자들에게 몸을 맡긴다. 나는 너희를 벌할 것이다.' 미국의 역사가이자 에세이스트 리베카 솔닛은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이 사건을 ‘정상인의 세계’와 차단하고픈 남자들의 욕망이라고 꼬집었다. '일부 남자들은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하고 싶어서거나, 방관자 남성의 안락함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반응을 보인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 사회는 샌타바버라 총기난사 사건에 미국 사회가 보인 반응을 ‘직수입’했다. 사건 피의자 김 아무개씨(33)가 정신질환 이력이 있다는 경찰 발표가 나오면서 여론은 이 사건을 ‘정상인의 세계’와 분리해낼 기회를 포착했다. 여성혐오에 기반한 증오범죄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기세를 올렸다. 극우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의 어느 이용자는 추모 장소가 된 강남역 10번 출구 앞으로 추모 물결을 조롱하는 조화를 보냈다. 조화에는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라고 적었다.

이 사건에 반응하는 여성들은 직장에서, 대중교통에서, 공중화장실에서, 골목길에서 겪는 일상의 공포를 증언한다(32~35쪽 기사 참조). 하지만 보통의 남자들은 터져 나오는 증언의 바탕에 깔린 공포의 정서에 주목하는 대신 겉으로 들리는 분노에 놀라, '남자를 혐오하지 마라'고 반응했다. 이들은 이 사건을 ‘증오범죄’로 규정하는 데도 거부감을 보였다.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데 모든 남자를 범죄자로 일반화하지 마라'는 논리가 한국에서도 판박이로 등장했다.

피의자가 정신질환 이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상인의 세계’와 차단되지는 않는다. 서천석 전문의(신경정신과)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이렇게 썼다. '정신병에도 맥락이 있다.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는 많은 조현병(정신분열병) 환자들이 중앙정보부가 도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피의자)가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 말은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다. 여성혐오다. 이것이 망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망상은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다.' 경찰의 CCTV 분석 결과를 보면, 피의자는 범행 장소인 화장실에 들어간 이후 남성 6명을 그냥 보낸다. 피해자는 피의자가 화장실에 자리 잡은 후 최초로 들어온 여성이었다.

사건 자체보다 이후 반응이 ‘사회적 현상’

학계는 대체로 증오범죄를, 주로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집단을 특정해 낙인찍어 발생하는 범죄로 정의한다. 증오범죄라는 별도의 범죄 유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살인·폭행·성폭행 등 기존 범죄가 소수집단을 향한 증오를 바탕으로 일어나면 그게 증오범죄다. 증오범죄 문제를 연구해온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법학)는 특정 사건이 증오범죄인지를 판단하려면 피의자의 범행 동기가 더 명확하게 나와야 한다고 보았다. 오히려 중요한 지점은 따로 있다고 홍 교수는 말했다.

ⓒEPA : 2014년 미국 샌타바버라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던 아일라비스타에 추모벽이 세워졌다. 당시 사건은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과 닮은꼴이었다.

'사건 이후 등장한 추모와 공감의 물결은 몇몇 목소리 큰 소수의 영향력을 훌쩍 넘어선다. 마치 흑인 대상 범죄에 흑인 사회가 보여주는 격렬한 반응을 보는 듯하다. 개별 범죄를 이만큼 깊숙이 ‘나의 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해당 소수자 집단이 오랫동안 차별과 폭력에 고통받으면서 집단적 정체성이 공고해졌을 때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의 ‘여성 집단’이 이 정도로 반응한다는 것이야말로 그동안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차별과 폭력의 강도를 말해준다. 말하자면 땅 밑으로 용암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해 그게 제대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인종이나 종교적 소수자와 달리 여성은 인구의 절반을 이루는 거대 집단이다. 이런 대규모 집단이 ‘소수자 정체성’의 단초를 보인다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대목이란 얘기다.

증오범죄가 성립하려면 소수자 집단을 향한, 개인감정 차원을 넘어서서 이데올로기화한 증오가 사회에 깔려 있어야 한다. 이 증오가 일시적인 분출이 아니라 지속성과 확산성을 띤다면 증오범죄가 등장할 토양이 갖춰진 셈이다. 즉, 이번 사건이 증오범죄인지 아닌지는 아직 정보가 부족하지만, 사건 이후 여성들이 소수자 특유의 강력한 집단 정체성을 보여준 것은 이들이 오랫동안 여성혐오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중요한 신호다. 이 사건이 진정으로 ‘사회적 현상’이 되는 대목은 사건 자체보다도 그 이후 터져 나온 물결이었다.

샌타바버라 총기난사 사건과 그 후폭풍을 보며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썼다. '그 금요일의 아일라비스타에서, 우리의 평형은 깨어졌다. 수백만명이 방대한 대화의 네트워크에 모여서 경험을 나누고, 의미와 정의를 재고하고,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다. 이 변화는 앞으로 더 자랄 것이고, 더 중요해질 것이고, 그리하여 피해자들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가 될 것이다.' 이 문장을 ‘그 화요일의 강남역에서’로 시작해 다시 쓰려는 이들이 나와 해시태그를 달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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