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 성폭력' 피해 아동들, 보호시설 기피 왜?

남혜정 2016. 5. 30.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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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B(14)양은 아버지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몸서리친다. 2년 전부터 아버지에게서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또다시 뻗어오는 ‘마수’를 거부하자 아버지는 B양 앞에서 어머니를 마구 폭행했다. 참다못한 B양은 언니에게 그동안 아버지에게 당한 것을 털어놓고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어머니도 망연자실한 채 눈물만 짓더니 아버지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본격화하자 달라졌다. “이제 누가 네 뒷바라지를 하느냐”, “범죄자 가족이란 낙인이 찍혀 살 수가 없다”며 닦달했다. 하지만 B양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아버지를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를 끝내 거부했다. 재판부는 ‘인면수심’의 친부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고 B양은 집을 나와야 했다. 성폭력 피해 상담센터 관계자는 “B양을 보호시설로 인계했지만 적응이 어려워 무단 이탈과 재입소를 반복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2. C양(11)은 맞벌이하는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오빠(14)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상담기관을 찾았으나 ‘아들이 소년부에 송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듣고 돌변했다. ‘딸 얘기가 오락가락한다’고 둘러댔다. C양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사 초기와 달리 진술을 거부했고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됐다. 피해 되풀이를 우려한 상담센터 측은 “C양을 잠시 시설에서 보호하고 오빠도 치료가 필요하다”고 제안했지만 부모의 거부로 무산됐다. 얼마 후 C양은 다시 상담센터를 찾아 오빠의 성추행 사실을 알렸다.

아동·청소년(19세 미만)을 상대로 한 친족 성폭력은 ‘비가해자 가족(가해자 외 가족)’이 피해자 보호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피해자가 같은 피해를 당하게 하거나 아예 가족을 떠나 살다 또 다른 범죄에 휘말리게 하는 등 2차, 3차 피해로 이어진다. 이런 악순환을 막고자 ‘보호시설’을 설치했지만, 가해자 처벌에 대한 원 가족의 우려와 압박, 가장의 경제력에 생계를 의지하는 현실적 한계,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입소자가 많지 않은 형편이다.

◆엄격한 규칙에 반발도…시설선 "가해자와 분리 필요"

30일 성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를 돕는 해바라기센터와 경찰 등에 따르면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들이 보호시설을 기피하는 주된 이유로 엄격한 생활규칙이 꼽힌다.

시설마다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이 있다. 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휴대전화와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기도 하며 새벽기도에 참석해야 하는 곳도 있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범행 장소인 집과 떨어진 곳에 입소하고 비밀 전학을 하는 예도 있다. 이는 또래 친구와의 관계가 중요한 아동·청소년 피해자들이 선뜻 시설 입소를 택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전국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관계자는 "일부 시설에서 입소자의 휴대전화 사용을 제한하는 것은 탈선 방지, 수사와 재판에서 가해자 측의 협박이나 강요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경북대병원 정운선 교수(소아청소년정신건강의학)는 “가해자한테 자신의 선택권을 빼앗긴 경험이 있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기 결정권’에 집착하는 특성이 있다”며 “통제나 강제적 지시는 반발심을 불러일으켜 치료 거부나 가출 같은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밝혔다.

◆눈높이에 맞는 시설 확충 필요

피해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맞춤형’ 시설 확충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이다. 현재 전국의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은 30곳에 불과하다. 이 중 19세 미만 친족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특별 보호시설’은 4곳뿐이다. 이들 시설의 수용가능 인원도 80명(각 20명)밖에 안 된다.

지난해 친족 성폭력 피해를 상담한 아동·청소년 3875명 중 보호시설에 입소한 피해자는 특별 보호시설 61명을 포함해 161명(4.2%)에 그쳤다. 100명 중 고작 4명만 이용한 것으로 나머지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거나 거주지를 떠나 또 다른 범죄 피해 위험에 노출돼 있을 공산이 크다.

정 교수는 “친족 성폭력은 일반 성폭력 피해보다 트라우마가 심각해 치료가 까다롭다”며 “피해자를 밀착 관리할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를 제대로 도우려면 재판 준비와 통원 치료를 체계적으로 지원, 관리해줄 인력과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서울 해바라기센터 박혜영 부소장은 “치료 과정은 피해 상황을 떠올리고 상처와 직면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어서 무작정 치료를 강요했다간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며 “피해자의 눈높이에 맞춰 치료를 한다면 시설 이용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혜정 기자 hjn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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