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부른 이름 엄마

이랑 입력 2016. 5. 2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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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인터뷰> 제이 라슨(혼혈입양인) : "(지난 80년 당시 화면) 어머니를 나는 지금 보고싶어요."

<인터뷰> 킴 크레이크(혼혈입양인) : "(한국)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뭔가가 다른 느낌이 있어요.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인터뷰> 권희정(인류학과 박사) : "한국아동양우회라는게 만들어졌는데 그게 혼혈아동 입양인을 해외로 보내기 위한 절차 그런걸 담당하는 부서였어요."

<인터뷰> 사라 사비다키스(혼혈입양인) : "만약 한국에서 누군가 자식이나 가족을 찾고 있다면 그건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찾을 수 있어요."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버이날과 어린이 날이 있죠.

하지만 11일은 무슨 날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입양인의 날입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뿌리채 옮겨져 낯선 곳에서 자라온 사람들.

특히 입양인 가운데서도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입양보내졌던 사람들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뿌리 찾기에 나섰습니다.

이들이 왜 입양을 갔어야만 했는지, 또 왜 지금 다시 뿌리찾기에 나섰는지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리포트>

올해 56살이 된 사라 사비다키스 씨, 난생 처음 생방송 출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고,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사연을 풀어냅니다.

<인터뷰> 사라 사비다키스(325KARMA 대표/혼혈입양인) : "50살 때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는데 제 뿌리를 찾고 싶었고 제가 어머니를 닮았는지 알고 싶어요."

한눈에 봐도 평범한 50대 한국인 여성과는 다른 외모.

쑥 들어간 눈과 날렵한 콧날은 서양인의 모습이지만 동그스름한 얼굴과 검은색 머리는 한국인, 사비다키스 씨는 혼혈인입니다.

<인터뷰> 사라 사비다키스(325KARMA 대표/혼혈입양인) : "제 아버지는 미군이었고 제 어머니는 의정부의 부대 근처에 있는 클럽에서 일하는 한국인 종업원이었습니다."

10살까지 한국에서 살다 미국으로 입양된 사비다키스 씨에게 한국에서의 기억은 아픔이 먼저 떠오릅니다.

<인터뷰> 사라 사비다키스(325KARMA 대표/혼혈입양인) : "제 유년시절은 매우 힘들었는데 전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제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한국을 찾은 이유, 본인의 엄마찾기를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다른 입양인들의 엄마를 찾아주는 일, 그리고 그 방법을 한국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입양인과 입양을 보낸 부모 사이 DNA 정보를 비교해 친부모를 찾는 길입니다.

사비다키스 씨 스스로가 DNA 검사 비교를 통해 미군이었던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냈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를 통해 친척과 이복남매 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사라 사비다키스(325KARMA 대표/혼혈입양인) : "제 기록은 전부 위조돼 있었고 막다른 길에 봉착했죠. 남은 방법은 DNA밖에 없었어요.D전 DNA로 아버지를 그렇게 찾았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와서 DNA 검사를 받으세요. 누군가 자식이나 가족을 찾고 있다면 찾을 수 있어요! 가능합니다."

지난해 11월 같은 혼혈입양인인 캐서린 킴 씨와 함께 뿌리 찾기를 돕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결과, 현재까지 미국에 있는 혼혈입양인 천여 명의 DNA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지금은 해외 입양된 자녀보다는 입양 보낸 부모의 유전자 정보가 더 많이 필요한 상황.

해외로 입양보낸 한국인 부모의 유전자 정보를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미국에 있는 입양인과 한국의 친부모가 DNA를 비교해 서로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김도현(뿌리의 집 목사) : "가족들과 해외로 입양간 입양인들이 재회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왜냐하면 이 유전자 검사는 한 사람과 한 사람만 맞춰보는게 아니고 한국의 한 가족이 미국으로 입양간 천명 이상의 입양인들하고 일일이 다 맞춰보고."

같은 한국계 혼혈인으로 미국에 입양된 기업가 토마스 클레멘트 박 씨가 힘을 보탰습니다.

백만 달러를 들여 DNA 검사 비교 키트 만개를 기증했습니다.

덕분에 사라 사비다키스 씨는 한국에 우선적으로 DNA 검사 비교 키트 300개를 들고 올 수 있었습니다.

혼혈입양인들이 유전자 감식 비교를 해서라도 스스로 친부모를 찾아 나섰다는 것.

그 이면에는 이렇게까지 하지않으면 부모를 찾기 힘들다는 슬픈 사연이 숨어있습니다.

혼혈 입양인들의 친모는 대부분 기지촌 여성이었고 친부는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입니다.

이 때문에 출생신고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입양 기록은 다른 입양인들에 비해 더더욱 부실하거나 왜곡됐습니다.

<인터뷰> 권희정(인류학 박사) : "이중적인 어려움, 기지촌 여성이었다라는 것 또 한국인이 아닌 해외, 외국인, 서양인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 그런 어떤 중첩적인 어려움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KBS 취재진이 입수한 혼혈입양인에 대한 당시 정부 문서들입니다.

입양 아동들을 분류한 기록을 보면 혼혈인은 장애의 한 유형으로 분류됐습니다.

우리 사회가 혼혈인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53년부터 65년까지는 혼혈인 집단 입양에 정부가 개입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1955년에 정부가 나서 설립한 <아동양호회>는 전국 혼혈아에 대한 양육과 보호 그리고 양자녀로 외국에 가는 혼혈아의 입적 수속을 취급했습니다.

<인터뷰> 권희정(인류학 박사) : "1954년 국무회의 자료같은 걸 보면 해외입양인은 원하는 외국 사람이 있으면 모두 이 사람을 보내라라고 하는 자료가 나오고요. 바로 그 해 한국아동양우회라는게 만들어졌는데 그게 이제 혼혈아동입양인을 해외로 보내기 위한 어떤 절차, 그런걸 담당하는 부서였어요."

다 자란 혼혈 청소년들이 어쩔수 없이 입양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인터뷰> 제이 라슨(혼혈입양인/당시 24살) : "(지난 80년 당시 화면) 어머니를 나는 지금 보고싶어요."

한국생활, 우리말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 혼혈 입양인들에게는 한국을 잊는 것과 타지에 적응해 사는 것 모두 다른 입양인들보다 더 모질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혼혈 입양인들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이 않되는 상황.

이미 입양된지 5,60년이 흐른 입양 1세대들이 한국에서 부모를 찾을 단서를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국에 6살 때 입양을 간 혼혈입양인 킴 크레이그 씨.

6살 무렵 고아원에 보내졌다가 미국으로 입양을 간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2번의 입양과 파양, 자신은 선택할 새도 없이 버림받고 또 어디론가 옮겨졌습니다.

40여 평생을 자신을 버린 한국을 미워했지만 자신의 딸들이 뿌리를 알고 싶어하면서 마음을 바꿨습니다.

<인터뷰> 킴 크레이그(혼혈입양인/한국이름 민정희) : "제가 부모찾기를 시작한 이유인데요. 한국과 한국인은 제 삶의 일부이고 부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를 만나면)말이 안 나올 것 같아요."

하지만 40여 년이 지나 엄마를 찾으러 왔을 때 크레이크 씨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옛 주소와 전화번호 뿐이었습니다.

<인터뷰> 킴 크레이그(혼혈입양인/한국이름 민정희) : "저한테 제공된 정보라고는 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주소뿐이었어요. 어머니는 이름도 개명한 상태였어요."

현재 킴 씨가 할 수 있는 건 미군 부대 일대를 찾아가 마지막 주소지를 들고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것 뿐입니다.

<인터뷰> 킴 크레이그(혼혈입양인/한국이름 민정희) : "화가 나요. 모든 정보를 갖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네요."

옛 주소라도 알고 있는 킴 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입니다.

<인터뷰> 김도현(뿌리의 집 목사) : "(혼혈입양인들은) 등록되지 않은 채로 살았던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 경우에 입양을 보내게 될 경우에 출생등록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까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고 또 어렸을 때니까 자기가 어디 살았는지 그거를 다 특정하긴 참 어려운."

실제 입양인들이 부모 찾기에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입양인이 입양 정보를 공개해달라고 중앙입양원에 청구한 건 가운데 친부모의 소재지가 파악된 경우는 절반 정도.

이 가운데서도 친부모의 정보가 공개된 건 15%에 불과합니다.

결국 7명 중 1명 정도만 부모의 소재지를 파악해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셈입니다.

<인터뷰> 소라미(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 "친부모의 동의를 확인하는게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인데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2,30년 전 기록을 갖고 찾는다는게 쉽지 않잖아요. 그러면 결국에는 경찰서나 관계 공공기관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이런 내용도 시행령에서 요청할 수 있다 정도로만 되다보니까, 입양기관은 또 민간기관이고 하니까 협조가 잘 안 이뤄어지죠."

부실한 기록에 의존해 더디게만 진행되는 친부모 찾기.

이제 혼혈 입양인에게는 사실상 DNA 검사가 마지막 희망입니다.

DNA 검사를 통해 50년 만에 친어머니를 만난 신디 번스 씨의 사연이 지난 17일 미국 CBS 방송에 크게 보도되면서 DNA 검사 비교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비앙카(네덜란드 입양인) : "부모님한테 화가 나진 않아요. 가슴이 막 뛰어요. 희망을 갖고 전 찾을거예요. 어머니를 만났을 때 제가 닮은 곳이 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박길자(서울 동작구/76세) : "그 시절에 너무나 가난하고 해서 그 아이들을 보낸 것이지 내가 버린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너무 너무 보고싶고."

<인터뷰> 김병윤(서울 성북구/55세) : "제가 만약에 못 찾아도 내가 죽기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봤으면 내가..."

5,60년대 해외로 입양된 혼혈인은 적게는 6천여 명에서 많게는 2만여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이들의 나이는 대체로 5,60대, 부모세대는 7,80대에 접어들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혼혈입양인들이 눈물을 씻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랑기자 (herb@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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