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죄-조선·해운 6대 도시 '하청의 비명']2만명 중 7000명이 떠났다..다음은 나일지 모른다

김지환 기자 2016. 5. 29. 23: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정치권도 빅3만 찾고 중소 조선사 외면" "나가도 갈 데 없어"

지난 24일 전남 영암 현대삼호중공업 조선소 안벽에 반잠수식 석유시추선(오른쪽)이 계류돼 있다. 지난해 9월 노르웨이 유전 개발업체인 시드릴이 시추선 계약을 취소하면서 바다 위에서 8개월째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삼호중공업지회 제공

“왱~.” 지난 24일 전남 영암 현대삼호중공업 해상 작업장(도크·dock)의 컨테이너선에선 용접한 부위를 매끄럽게 가는 갈개(그라인더) 소리가 들려왔다. 현대삼호중공업엔 해상 도크 2개, 육상 도크 1개가 있는데 빈 도크는 보이지 않았다. 수주한 일감이 아직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최대 2만명의 원·하청 노동자가 일하다 올해 들어 해양플랜트 물량이 사라지며 7000여명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이곳에서 예전 같은 분주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해양플랜트 물량이 두 건 있던 지난해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밀려드는 통에 주차장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이 조선소 외부에 차를 대기도 해 경찰이 ‘딱지’를 끊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김성웅 금속노조 현대삼호중공업지회 교선부장이 전하는 지난해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미 하청 노동자 중심으로 구조조정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 조선소 안벽엔 주인을 찾지 못한 반잠수식 석유시추선만 덩그러니 계류돼 있었다. 지난해 9월 노르웨이 유전 개발업체인 시드릴이 현대삼호중공업 측에 시추선 계약 취소를 통보해 왔기 때문이다.

조선소의 감기는 사외 협력업체의 독감으로 이어진다. 선박 블록공장과 조선 기자재 공장이 모여 있는 영암 대불국가산업단지도 직격탄을 맞았다. 대불산단과 현대삼호중공업 등에서 하청 용접공으로 일해온 김태호씨(55·가명)는 “이곳에 있던 하청 노동자들 중 일부는 삼성전자가 평택에 짓는 반도체단지 공사 현장 등으로 옮겨갔다”면서 “지난해 17만~18만원가량 하던 베테랑 용접공 일당이 올해 들어 13만원 수준으로 줄어들 정도인 데다 일감 자체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경향신문은 지난 24~26일 금속노조,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와 함께 군산, 목포, 통영·고성, 거제, 부산, 울산 등 주요 조선·해양 6대 도시를 돌며 조선소의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선업 세계 1위를 만들어낸 ‘비결’이었지만 일감이 줄어들면 언제든 손쉽게 쳐낼 수 있는 이들은, 벼랑 끝 조선업의 뱃머리에서 가장 먼저 칼바람을 맞고 있었다.

“지금 군산 지역에선 경기가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안 좋다고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지난 24일 군산시청에서 만난 서동완 군산시의원은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울산조선소로 흡수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돈다”며 흉흉한 분위기를 전했다.

군산시의회 자료를 보면 지난해 군산조선소, 사내하청, 사외협력사 등에서 일했던 노동자는 5960명이다. 하지만 올해 2월 말 현재 전체 노동자 수는 3700명으로 줄어들었다. 울산(현대중공업 본사)이 기침하자 군산은 탈진 위기에 처했다.

현대삼호중공업에서 차로 20분 남짓 달려 도착한 영암 대불국가산업단지의 분위기도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선 현대삼호중공업, 대한조선뿐 아니라 통영·고성의 성동조선·SPP·STX조선, 울산의 현대미포조선 등에 선박 블록, 기자재 등을 납품한다.

이곳에서 만난 조기형 금속노조 전남서남지역지회장은 “조선 호황기 때는 생산직 100%가 비정규직이어서 생산단가가 낮은 대불산단 업체에 조선소들이 선박 블록 제작 등을 맡겼다”며 “하지만 최근 불황이 찾아오면서 일감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통영·고성 등지에 몰려 있는 중소형 조선소들은 ‘빅3’(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에 가려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25일 찾은 SPP 통영조선소 입구에는 ‘SPP’라는 알파벳 대문자가 선명했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공장 가동을 멈춘 상태다.

탱크선(석유화학제품선)이 주력인 성동조선은 내년 상반기까지 버틸 일감만 확보돼, 다음달까지 추가 수주를 하지 못하면 내년 하반기부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강기성 금속노조 성동조선지회장은 “정치권에서 최근 빅3 중 하나인 대우조선 노조 등을 만나고 돌아갔는데 더 열악한 중소형 조선소는 소외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중소형 조선소는 비정규직이 75%이기 때문에 위기가 왔을 때 하청 노동자가 받는 타격이 더 크다”고 말했다.

25일 오후엔 STX조선이 법정관리에 들어간다는 우울한 뉴스를 접하며 거제로 향했다. 이날 저녁 거제에서 만난 삼성중공업·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예전에는 물량을 따라 울산, 목포, 거제 등지로 옮겨다녔지만 조선경기 불황으로 앞으론 일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퇴근 뒤 곧장 나와 작업복을 입고 있던 삼성중공업 하청업체 노동자 김형근씨(45·가명)는 “하청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금 나가봐도 갈 데가 없다는 이야기가 돈다”며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만큼 향후 임금 삭감 등 근로조건이 후퇴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2011년 희망버스가 다녀간 부산 한진중공업에서도 하청 노동자 구조조정이 이미 진행됐고 또 예고된 상황이다. 한진중공업은 최근 채권단과 상선 분야를 정리하고 고부가가치 특수선에 집중하기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26일 영도조선소 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박민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은 “지난해 2000명 규모였던 하청 노동자가 1500명으로 준 것으로 추정된다”며 “내년 상반기까지 확보된 상선 물량이 정리되면 상선 분야 정규직이 특수선 분야로 이동하면서 하청 노동자 구조조정이 추가로 진행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대중공업 도시’로 불리는 울산 동구에서 만난 하청 노동자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6일 저녁 만난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은 “지난해가 기성(원청이 하청업체에 주는 도급비) 삭감의 해였다면, 올해는 임금 삭감의 해”라며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규모는 지난달 말 기준 3만2569명으로 2014년 10월 말보다 8661명 감소했다. 구조조정의 칼날은 피한 노동자라 해도 임금 삭감의 칼날은 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미포조선 하청 노동자 변기원씨(가명)는 “미포조선은 2008~2009년 중소형 조선소가 무너진 이후 이들 업체가 주로 만들던 벌크선을 대거 수주했다”며 “하청 노동자가 많이 유입됐고 밥 먹을 때 줄 서는 게 짜증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2014년 초 9000명에 이르던 하청 노동자 수는 현재 7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을 오가며 20년가량 물량팀으로 일해온 정형수씨(가명)는 2000년 당시 일당 15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16만원이던 일당은 올해 들어 1만원씩 깎이더니 이달 현재 13만원으로 줄었다. 근속에 따라 임금이 오르긴커녕 조선경기 불황으로 되레 일당이 깎인 것이다. 정씨는 “20년간 일을 해왔지만 근로계약서 한 장 받아본 적 없었다”며 “혹자는 일당이 세다고 하지만 고용이 불안하고 성과급도 없는 데다 산재 처리를 정식으로 요구하지도 못할 만큼 ‘을’의 지위”라고 말했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