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 강제징용에 원폭까지 한 맺힌 71년, 피해는 대물림

2016. 5. 2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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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 앵커 ▶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에는 보시는 것처럼 한국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비도 있습니다.

당시 히로시마에 살던 한국인 10만여 명 가운데 절반 정도가 피폭돼 3만 명 넘게 숨졌는데요.

생존자들은 통한의 세월을 견뎌야 했고, 고통은 후손들에게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정시내, 장영, 두 기자가 차례로 보도합니다.

◀ 리포트 ▶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8월 6일.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실은 미국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이륙합니다.

목적지는 일본의 군사 도시, 히로시마.

오전 8시 15분, 9,500미터 상공에서 투하된 원자폭탄.

강력한 폭발과 함께 버섯구름이 치솟았고, 도시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42만여 명이 방사능에 피폭됐고 16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폭 피해자]
"피부가 누더기 조각처럼 변하고, 손의 피부도 늘어져…."

당시, 히로시마에 거주한 한국인은 10만여 명.

대부분 징용 노동자로 끌려갔는데, 이 중 5만여 명이 피폭됐고 사망자도 3만여 명에 달합니다.

일본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이자 원폭 피해자로 이중의 고통을 당했던 한국인들.

하지만, 일본인 다음으로 가장 원폭 피해가 컸던 한국인 희생자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히로시마를 방문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사죄를 촉구했습니다.

[한정순/원폭 피해자 2세]
"(원폭 피해가) 대물림되는 잔인한 모습들을 여러분이 기억하시고, 사과와 배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MBC뉴스 정시내입니다.

◀ 리포트 ▶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들이 화분에 돌을 채워 넣고, 물을 주며 정성껏 가꿉니다.

모두 '원폭 피해자'입니다.

16살 때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본 김판근 씨는 종전 후 가족과 함께 고국 땅을 밟았지만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김판근/원폭 피해자]
"(아내는) 나가사키 피해자고, 저는 히로시마 피해자고. (동생들은) 남의 집에 소도 먹이고 일하러 머슴살이도 하고 그랬습니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상처는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이수용/원폭 피해자]
"림프선이 끊어져서 양쪽 다리가 부었습니다. 이 스타킹 안 신으면 못 걸어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인은 7만여 명, 살아남은 3만여 명 중에 2만 3천여 명은 귀국 후 대부분 경남 합천에 터를 잡았습니다.

원폭 피해자의 60~70%가 합천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 원폭피해 생존자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 수가 점점 줄고 있지만 2세, 3세 상당수가 질병을 앓고 있어 피해는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MBC뉴스 장 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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