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강간'에 시달리는 여성들 목소리.."수치 그리고 공포"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입력 2016. 5. 27. 12:01 수정 2016. 5. 27. 14:3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람계곡의 페미니즘' 피해 사례 수집 중.."시선에는 언제나 권력이 수반된다"
영화 '에너미' 스틸컷
"20대 때 경험 두 개 씁니다. 어느 여름날 강변을 달리러 나갔어요. 더우니까 어깨와 팔이 드러나는 상의를 입었습니다. 달리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40대쯤 되는 남성 두분이 나란히 뛰어오면서 절 봤다 서로 마주봤다 하며 히죽거리더라고요. 기분 나빠하며 지나쳤는데, 지나치자마자 "아, 좋다!" 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한 명. 키득대는 다른 한 명. 내 몸을 자기들 맘대로 대상화하는 그 시선 너무 싫었어요. 모 중소기업에서 근무할 때 40대 남자 사장은 제가 보고 하러 들어갈 때마다 습관처럼 눈을 제 흉부에 고정시키고 있더라구요. 보고 받으면서도 그랬구요. 저는 필요 없는 빈 문서철이라도 가지고 들어가서, 눈이 꽂히면 바로 문서철을 가슴에 대어 가리며 보고를 올리고는 했습니다. 부하직원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사람을 어떻게 존중하겠어요."

페이스북 페이지 '바람계곡의 페미니즘' 운영진이 18일부터 31일까지 수집 중인 '시선 강간' 피해 사례 가운데 하나다.

운영진은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지만 현행법상 처벌하기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항상 면죄부를 받는 '시선 강간'에 대해 고민하면서, 실제로 여성들이 남성들의 '시선'을 어떻게 느끼는지 혹은 남성들의 '시선'은 어떤 방식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지를 여성들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피해 사례를 모집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일정 분량이 모이면 차곡차곡 새로운 글로 정리해 올리도록 하겠다"며 "사례들이 많이 모여 글 내용이 풍부해지겠다 싶으면 언론사에 투고해 보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성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주류적 시선은 여전히 후진적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성을 단순히 혐오나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피해 당사자인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바람계곡의 페미니즘 측이 수집한 피해 사례 가운데 일부를 전한다.

#1. 예전 매장 50대 사장님. 고객 중 짧은 옷이나 타이트한 바지, 붙는 상의 입고 오면 다리부터 얼굴로 훑으시는데 고개까지 절로 시선 따라 움직이더군요. 그래서 그 매장서 일하는 동안은 절대 반바지도 안 입었네요.

#2. 하얀셔츠를 입고 검정색 h라인 스커트를 입고 아파트 근처 경로당을 지날 때면 늘 할아버지들이 밖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시다가 정말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고개까지 돌리면서요. 길이가 짧냐구요? 아니요. 무릎까지 오는 겁니다. 셔츠가 타이트하거나 비치는 소재였냐구요? 아니요. 루즈한 핏에 봄가을용이라 요즘은 목에서 땀이 주륵 흐르더군요. 그저 출근복장이었습니다.

#3. 뭐 이런 거 사례가 필요한가요? 전철 타기만 하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당하는 게 시선 강간인데…. 당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다리.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가는 고개. 당연하다는 듯이 마주치는 눈. 당연하다는 듯이 내 몸을 훑는 시선. 당연하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얼굴.

#4. 우리 학교 기숙사식당은 야외계단을 걸어올라가야 나옵니다. 저보다 약 10보 앞에서 그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하얀 테니스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계단 난간쪽으로 걸어올라가던 그 분이 약 다섯 칸 정도 올랐을 때 바람이 불어서 치마가 살랑거렸습니다. 그러자 계단 밑 난간 근처에 있던 한 남자가 집요하게 고개를 숙여서 그 여자분의 치마 속을 보려고 하더군요. 바람부는 게 끝나자 고개를 들던데 그순간 그 남자와 제가 눈이 마주쳤습니다. 잘못을 들킨 아이인 양 시선을 피하며 후다닥 도망갔습니다. 그분이 제 얼굴에 드러난 혐오를 부디 읽으셨길 바랍니다. 일 년전 일이지만 아직 생생합니다. 그 모든 것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고나니 그 날 이후 치마 입고는 난간쪽으로 절대 못 걸어다니겠더군요.

#5. 헬스장에서 친구와 스쿼트 하는데 운동도 안하시면서 기구에 앉아 신문만 보시던 할아버지가 계속 힐끔거리면서 쳐다보셨어요. 시선이 신경쓰여서 결국 다른 운동 먼저 하자며 자리를 피한 적이 있네요. 운동복이 짧거나 야하지도 않았습니다. 긴 츄리닝에 후드집업 입고 있었는데도 쳐다보는 사람들은 다 쳐다보더라구요.

#6.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나오는데 제 또래 남자들이 지나가면서 제 가슴부터 다리까지 훑더라구요. 꽤 가까이에서요. 제 차림은 그냥 기본 긴팔티에 반바지였어요. 남자1이 남자2를 툭 치면서 "훑어보지 마라" 하고 낄낄대면 남자2는 "안 봤어 새x야"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더군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수치스럽고 기분 정말 더러웠습니다.

#7. 반바지를 입고 지나갈 때 다리를 쳐다보는 건 거의 뭐 일상이고 당연한 일이 됐구요. 심지어 스키니를 입어도 엉덩이, 다리 다 쳐다봅니다. 한 번은 앞에 스키니를 입은 여자분이 걸어가시는데 제 바로 옆에 걷고 있던 남자들이 "엉덩이가 처졌다" "허벅지가 굵다" "저런 다리의 여자친구는 어떻냐"는 등 여자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봤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있었던 일입니다. 후드티에 스키니를 입고 친구와의 약속장소로 향하던 중에 남자 두 명이 "몸은 봐줄 만한데 얼굴이 별로네" "저런 애랑은 어떤데?" 하며 희롱하는 듯한 말과 제 몸을 훑는 시선 강간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제 복장은 지극히도 평범했고 노출이 심한 옷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 돋고 기분이 더럽습니다. 아직까지도 피해자의 복장 탓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하고 싶습니다. 복장이 어떻든 시선으로, 말로, 행동으로 희롱하고 추행하고 폭행할 자격은 없습니다.

#8. 친구들과 가벼운 술자리를 마치고 날이 저물었을 무렵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버스의 1인용 좌석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뒤편에서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제 앞의 좌석으로 와 자리를 잡더니 몸을 뒤로 돌려 저를 쳐다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버스 안에는 승객이 많지 않았고, 빈 좌석은 충분히 많았습니다. 저를 쳐다보기 위해 앞자리로 이동해서 몸을 돌려 대놓고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에 저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저를 정면으로 쏘아보는 시선에 눈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왜 나를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나 정말 무서웠으니까요. 그 아저씨는 말끔한 양복에 서류가방을 든 직장인이었고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딴 곳을 보는 척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먼저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저는 아저씨가 버스에서 정류장을 놓칠 뻔했다는 듯 허겁지겁 내리고 나서야 졸였던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저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고 언제든 다시 마주칠 수 있었으니까요. 시간이 지나서야 그 사람이 나에게 왜 그런 짓을 했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가 나를 쳐다본 것은 단지 '쳐다볼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선에는 언제나 권력이 먼저 수반되지요.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jinuk@cbs.co.kr

Copyright © 노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