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자 절벽' 주택청약예금의 배신
50대 직장인 A씨는 1991년 내집 마련의 꿈을 안고 한국주택은행의 주택청약정기예금에 300만원을 납입했다. 당시 은행원은 연이자 10%를 보장한다고 했다. 주택은행은 2001년 현 KB국민은행에 흡수됐고, 그동안 예금 이자는 계속 지급됐다.
그런데 국민은행은 25년 동안 지급했던 이자를 다음달부터 1.8%로 깎겠다고 지난 16일 A씨에게 우편 통보했다. 저금리 시대에 다른 예금과 형평성을 맞추겠으니 널리 양해바란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A씨는 “충분한 설명도 없이 금리를 한꺼번에 깎아도 되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국민은행이 길게는 28년간 유지됐던 주택청약예금의 금리를 한 번에 최고 8.2% 포인트 깎겠다고 일방 통보해 빈축을 사고 있다. 금리를 ‘절벽’ 수준으로 낮추면서 금융 당국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았고, 변경 2주 전 홈페이지 게시와 우편물, 이메일 통보만 해 고객 신뢰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금융감독원에는 A씨와 같은 고객들이 제기한 민원이 23일까지 13건 접수됐다. 60대 여성 B씨는 1988년 일시금 400만원을 넣었다가 4∼5년 전 상품을 해지하려고 국민은행을 찾았다. 담당자는 “10%대 이자 상품이니 계속 유지하라”고 조언했다. B씨는 최근 지인으로부터 금리 조정 소식을 들었다. 주소 변경이 안 돼 있어 우편 송달을 못 받은 것이다. B씨는 “영문도 모른 채 줄어든 이자를 받을 뻔했다”고 황당해했다.
이들이 가입한 상품은 주택은행이 1988∼1991년 한시적으로 팔았다. 당시 정부의 일산·분당 신도시 건설 정책 등과 맞물려 청약통장 가입 캠페인이 진행됐다. 하지만 주택 공급량이 기대에 못 미친 데다 분양 과열로 적잖은 이들이 당첨을 받지 못하고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금융 당국은 이번 금리 조정에 개입할 근거가 특별히 없어 답답하다는 입장이다. 해당 상품 약관은 만기 후엔 은행이 정한 ‘소정의 이자’를 지급한다고 돼 있다. 약관 변경 사항이 아니라 손해를 보면서 금리를 계속 유지하라고 지도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불공정 약관으로도 보기 어렵고, 사전 협의 의무는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가입 당시 약관 설명을 충분히 듣지 못했던 소비자들이 금리 충격을 그대로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일종의 불완전판매다. 사실상 정부가 주도해 판매한 청약상품의 금리를 20여년이 지난 지금 한 번에 내리는 건 금융상품 신뢰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무법인 로고스 최진녕 변호사는 “금리를 순차적으로 내리지 않고 한 번에 큰 폭으로 내리는 건 부당하다는 소송이 제기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88년 500만원을 넣었다는 정부부처의 한 차관급 기관장은 “약관을 무기로 별다른 설명 없이 금리를 낮추는 건 사회 통념에 반하고 신뢰를 무너뜨리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국민은행 측은 굳이 지급할 필요가 없는 고금리 혜택을 계속 베풀었기에 금리 인하가 문제될 건 없다는 입장이다. 한 관계자는 “현재 기준금리가 1.5%인데 10% 이자를 계속 주는 건 힘들다”며 “신뢰 문제 때문에 그동안 고금리를 유지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은행 측은 대부분의 예금 금액이 400만∼500만원이라 개인별 이자 규모가 크게 줄지는 않을 것이란 입장이다. 금융 당국은 이 상품의 전체 예금 규모가 2000억원 수준인 것으로 파악한다. 국민은행은 계좌 수와 전체 예금 규모 공개를 꺼리고 있다.
나성원 조민영 기자 naa@kmib.co.kr
[경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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