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시오노 나나미 혹은 전체주의의 유혹 / 길윤형

입력 2016. 5. 26. 20:06 수정 2016. 5. 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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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대학 1학년 때였으니 1995년으로 기억한다. 선배의 자취방에 가서 우연히 책 한권을 펴 들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잠깐 서점에 들렀다.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 1권이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그의 팬이 됐다. 책 2권에서 그가 묘사했던 ‘칸나에 회전’에 대한 설명, 4~5권에 나오는 카이사르에 대한 묘사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몇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나중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등 다른 저작들도 탐독했다. 그의 역사 기술 방식에 대해 ‘영웅 중심적 사관’이라거나 ‘전체주의적 색채가 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20대의 난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도 서울 집 서가엔 그의 책이 스무권 넘게(<로마인 이야기>는 무려 15권짜리 대작이다!) 꽂혀 있다.

27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앞두고, 내 마음도 여러모로 조급해졌다. 무서울 것 없는 사건 기자였던 2005년에 피폭자 2세 운동을 벌이던 김형률(1970~2005)이 갑자기 죽었다. 우리 모두 깜짝 놀랐고, 원폭 피해의 무서움에 몸을 떨었다. 아베 정권이 히로시마를 내세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엔 깊은 위화감을 느끼지만, 원폭 피해 당사자들이 미국 대통령에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사죄를 요구하려는 마음은 인지상정상 이해할 수 있다. 90% 이상의 한국인들이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한국인·조선인 원폭 피해자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다는 전제 아래 오바마의 이번 방문을 환영할 것이라 믿는다. 인류가 겪은 이런 고통을 부인하는 이와는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없다.

25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시오노의 인터뷰를 읽었다. 인터뷰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피폭자들의 ‘낮은 목소리’가 아닌 일본이라는 ‘국가의 품격’이었다. 대학 시절 용돈을 아껴 구입했던 수많은 책들에 대한 기억과 인터뷰의 역겨운 주장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말 그대로’ 책상 위에 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죄를 요구하지 않고, 무언으로 조용하게 (오바마 대통령을) 맞이하는 것이, 사죄를 목소리 높여 요구하는 것보다 단언컨대 (일본의) 품격이 높다고 인상지을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이) 유럽을 역방(歷訪)하면서 ‘일본이 나쁜 짓을 했지만 사죄를 하고 있지 않다’고 호소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나에겐 (이것이) 구제불능의 외교 감각 결여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일본이 원폭 투하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 것의 의미가 크다. 구미 국가들이 볼 때 같은 아시아 사람인데, 국가의 품위에 차이가 있다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데모나 집회도 일절 중단하고, 조용히 어른처럼 맞이했으면 한다.”

히로시마엔 맘 편히 자신의 피폭 경험을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지금껏 오바마 대통령에게 사죄를 요구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낸 이는 히로시마의 저명한 평화운동가인 모리타키 이치로(1901~1994)의 딸 하루코 ‘핵무기 폐기를 지향하는 히로시마의 모임’ 공동대표뿐이다. 자신의 피해만을 내세우는 피폭자들을 보는 것도 애매한 일이지만, 이들의 자연스런 감정 분출을 봉쇄하려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엔 진심으로 숨이 막힌다. <아사히신문>은 왜 이따위 인터뷰를 이처럼 민감한 시기에 실은 것일까.

길윤형 도쿄 특파원

서울에 돌아가거든 시오노의 책을 남김없이 치울 생각이다. 한 사람의 간절한 호소를 국가의 품격이란 이름으로 차단하려는 사회를 우린 뭐라 불러야 할까.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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