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김에 트럼프? 트럼프 선택한 '상식 밖의 블록'

천관율 기자 입력 2016. 5. 25. 10:48 수정 2016. 5. 2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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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거대한 농담을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되면서, 패권 국가에서 벌어지는 상식 밖 현상을 해석하느라 세계가 분주해졌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되면 내 칼럼을 먹겠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는 신문지가 들어간 코스 요리를 먹는 동영상을 올렸다. 트럼프를 대놓고 조롱했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트럼프는 우리의 존중을 받을 만하다'라며 뒤늦게 수습했다. <뉴욕 타임스>는 '공화당의 자살'이라고 신랄하게 논평했다.

트럼프의 캠페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정치에서 확립된 거의 모든 상식과 맞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데이터를 활용한 선거 예측으로 스타가 된 분석가 네이트 실버도 ‘트럼프는 경선에서 이길 수 없다’고 본 수많은 (사실상 모든) 전문가 중 하나다. 실버는 자신이 왜 예측에 실패했는지를 돌아보면서, 트럼프의 지지층이 예상보다 훨씬 견고하고 특정한 신념들을 공유하는 투표 블록으로 드러났다고 썼다. 다만 그 특정한 신념의 조합이 상식과 너무나 달라서 하나의 블록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AFP : 5월2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예비경선 후보가 미국 인디애나 주 경선에서 연설하고 있다.

공화당 후보 트럼프를 만든 ‘상식 밖의 블록’은 백인, 남성,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저학력층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아래 <표> 1~6은 트럼프 지지층이 주요 이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를 보여준다. 트럼프 지지층과, 마지막까지 트럼프와 경쟁했던 테드 크루즈 후보의 지지층 그리고 미국인 유권자 전체 평균을 비교했다.

공화당의 기존 노선은 작은 정부, 시장에 대한 신뢰, 자유무역에 대한 단호한 지지,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해야 한다는 국제 개입주의, 낙태와 동성애에 반대하는 문화적 보수주의 등이 꼽힌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층은 이 모두를 비튼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유무역협정이 미국에는 손해라고 강하게 느낀다(67%). 민주·공화당 어느 쪽에서도 이 정도로 강력한 반(反)자유무역 정서는 찾을 수 없다. 미국의 경제 시스템이 힘 있는 사람에게만 유리하다고 느끼는 트럼프 지지자도 61%로, 기존 공화당보다 뚜렷이 짙은 시장 불신을 보여준다.

반(反)이민 정서도 가장 단호해서, 69%에 이른다. 미국 자체가 이민자의 나라이므로 반이민은 건국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미국 엘리트들은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트럼프 지지층은 이를 무시한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자는 트럼프의 주장은 이들에게 그저 막말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정책 제안이다. 트럼프 지지층은 국경 장벽 지지율이 84%로 가장 높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립주의 성향도 강하다. '미국이 세계의 문제에 너무 많이 관여한다'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54%로, 역시 어느 유권자 블록보다 높다. 미국 안보 전략의 핵심축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마저 미국에 손해라고 보는 비율도 30%나 된다. 크루즈 지지층은 12%, 전체 유권자는 16%만이 나토가 미국에 손해라고 본다.

반면 이들은 기존 공화당 블록보다 종교적 열정이 눈에 띄게 묽다. 아들 부시의 대선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문화적 보수주의에 대체로 시큰둥하다. 낙태가 불법이어야 한다고 믿는 비율은 53%로, 크루즈 지지층의 단호함(73%)과는 거리가 멀다.

트럼프 지지층의 성향은 독특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독특한데, 국제정치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난감한 느낌을 담아 트럼프 지지 블록을 'un-conservative conservatives (보수적이지 않은 보수파)'라고 지칭했다. 이들은 공화당의 핵심 가치라는 시장 자유, 국제 개입주의, 문화적 보수주의에 별 관심이 없다. 누구보다 자유무역을 싫어하는 유권자들이 자유무역을 성배로 생각하는 정당에 밀려들어와, '중국산 제품에 관세 45%를 물리자'고 말하는 ‘막말꾼 광대’를 대선 후보로 밀어올린다. 트럼프 현상 초기에는 분석가들 대부분이 이런 이유로 이들의 정체를 잡아내는 데 애를 먹었다.

이제는 좀 더 뚜렷해졌다. 이 저학력 백인 남성들은 ‘리얼리티 쇼에 세뇌된 멍청이’가 아니라 불안하고 화가 나 있는 유권자다. 자유무역으로 들어오는 중국산 제품과 멕시코 국경을 넘는 이민자의 물결이 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공포와 분노가 보수의 핵심 가치를 대체했다. 트럼프 지지층 중 75%가 '미국인의 삶이 50년 전보다 나빠졌다'라고 생각하는 비관론자다.

‘반세계화·반이민’ 내세운 트럼프의 여러 동지들

이 분노한 유권자들은, 미국에서는 1차로 당내 경선의 문턱을 넘는 데 성공했을 뿐이지만 이들이 대서양 건너편을 바라본다면 앞서나가는 동지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트럼프 지지층과 유사하게 ‘반(反)세계화·반(反)이민’을 핵심 동력으로 삼는 분노한 유권자들이 앞세운 정치인이 이미 정권을 잡았거나 권력에 바짝 다가서고 있다.

헝가리는 극우 포퓰리스트인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집권 중이다. 오스트리아는 극우 정당 후보가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상태로 결선투표를 앞두고 있다. 영국은 6월에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할 예정인데, 극우 성향인 영국 독립당은 물론이고 집권 보수당 내에서도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이 브렉시트 지지를 선언했다. 프랑스는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 대표 마린 르펜이 내년 대선에서 결선 두 자리 중 한 자리를 사실상 예약했다.

ⓒEPA : 2015년 9월3일 트럼프 후보가 멕시코에 대해 부정적 언급을 한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뉴욕 시 트럼프 타워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유럽의 극우 정당들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복지 확대를 결합한 ‘복지 쇼비니즘’을 내세워 유권자를 파고들고, 한때 좌파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중하층 노동자와 공무원이 반세계화와 반이민을 약속하는 극우 정당에 표를 주기 시작했다. 서구 정치가 익숙했던 문법이 모조리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서구 세계의 정치는 좌·우파의 이념이 가운데로 수렴하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좌파는 국유화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였고, 우파는 완전한 시장 자유 대신 일정한 정부 개입과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세계화에 직격탄을 맞았다고 느끼고, 복지 혜택을 ‘부당하게’ 이민자와 나누는 데 화가 난 중하층 원주민(주로 백인) 집단이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을 ‘배신당한 노동계급’이라고 부르는 논평도 있다. 이들은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좌·우파 정치 엘리트를 싸잡아 불신한다. 이제 전후 합의의 밖에 있던 ‘새로운 도전자들’이 기세를 떨친다.

유럽과 미국에서, 좌·우파 정치 엘리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위기를 맞이했다. 트럼프를 비롯한 새로운 도전자들은 대부분 막말을 일삼고 엘리트의 세련된 태도와 일부러 거리를 둔다. 엘리트 혐오(특히 미국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혐오)를 공유하는 분노한 유권자에게 이런 모습은 흠결이 되지 않았다. 트럼프가 막말 때문에 캠페인에 타격을 받은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하버드 대학 케네디스쿨)은 3월에 발표한 ‘분노의 정치’라는 글에서 역사를 렌즈 삼아 일련의 거대한 흐름을 다뤘다. 제어되지 않는 세계화는 탈락한 기층의 반발을 부른다. 로드릭은 지금보다 먼저 분노한 유권자의 물결이 몰아닥쳤던 시대를 지목한다. 그가 ‘첫 번째 세계화 시대’라고 부른 20세기 초반의 ‘과잉 세계화’는 소외된 기층의 파멸적인 반동을 불렀으니, 그것이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전간기)를 휩쓴 공산주의와 파시즘이었다. 이 ‘첫 번째 분노의 정치’는 인류사 최악의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을 낳았다. 2차 대전 이후 서구는 이 교훈을 바탕으로 세계화의 속도를 제어하고, 복지 시스템으로 분노의 정치를 예방했다. 하지만 고삐는 다시 풀려버렸고, 이제 다시 전간기를 휩쓸었던 분노의 정치가 돌아오려는 중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분노의 정치는 오른쪽뿐만 아니라 왼쪽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는 정치를 대하는 헌신과 신념, 미래 비전을 제시하려는 태도, 메시지의 일관성 등 거의 모든 점에서 트럼프와 크게 다른 정치인이지만, 한 가지만은 비슷하다. 트럼프만큼이나 샌더스 현상도 기존의 좌·우 합의 밖에서 불어닥친 돌풍이었다.

트럼프는 일차 허들을 넘었고 샌더스는 탈락 직전이다. 그러나 두 흐름 모두 2016년 대선 이후로도 미국 정치의 중요한 변수가 되리라는 전망이 많다. 이를테면 트럼프가 11월 본선에서 탈락한다 하더라도 ‘트럼프 현상’은 4년 뒤든 8년 뒤든 다른 후보를 만나 더 증폭되어 돌아올 수 있다. ‘샌더스 현상’도 마찬가지 잠재력이 있다.

ⓒAP Photo : 5월10일 민주당 경선에서 연설하는 버니 샌더스 후보. 트럼프처럼 샌더스 현상도 기존 좌·우 합의의 밖에서 불어닥친 돌풍이었다.

트럼프 현상은 유럽과 비교하면 유행에 한발 처졌다. 그럼에도 ‘분노의 정치 미국판’은 독특하다. 유럽에서는 등장하지 않았거나 주변적이었던 쟁점이 미국에서는 중요해진다. 미국은 국제 질서를 결정하는 패권국, 학자에 따라 차라리 ‘제국’이라고도 부르는 국가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든다.

공화당 후보 선출이 확실시되던 4월27일 트럼프는 자신의 국제정책 기조를 밝히는 연설을 한다. 본선을 염두에 두고 말투가 온건해지기는 했으나, 근본 기조는 변함없었다. 트럼프가 보기에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자원을 낭비하고, 우리 동맹들은 그들의 몫을 내지 않는다(한국이 틀림없이 포함된 얘기다). 미국의 국제정책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국제정치학자인 조지프 나이(하버드 대학)는 '트럼프가 사실상 고립주의 정책을 다시 들고 나왔다'라고 논평했다. 국제 문제에 부질없이 자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목표만이 확실하고, 그 외의 전략('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 따위)은 모호한 말잔치에 가깝다. 패권국 미국이 국제사회에 내놓는 투자를 낭비로 간주한다. 그의 지지자들이 가진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아래 <표> 4).

이것은 미국의 민주·공화 엘리트들이 공유하는 합의를 뒤흔든다. 미국 엘리트의 관점에서 보면 패권국 미국은 일종의 ‘국제 공공재’를 공급하는 나라다. 핵안보 질서를 유지하고, 국제법과 국제기구의 권위를 지키고, 자유시장을 보호하며, 자유무역 체제에서 개발도상국의 제품을 소비해주고, 글로벌 기축통화를 공급하는 등이 ‘제국의 책무’다. 이런 비용을 지출해서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편이 미국에도 좋다. 현재의 국제 질서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나라가 미국이라서다.

정치 엘리트의 합의에 제동 거는 ‘분노한 유권자’

그런데 분노한 유권자들은 엘리트의 셈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의 눈에는 국제 공공재를 공급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불확실해 보이고, 당장 삶이 추락하는데도 내 세금을 엉뚱하게 쓰는 한가한 이야기로 들린다. 여러 학자들이 서로 다른 표현으로 이 현상, 즉 ‘민주적 제국’에서는 유권자가 제국의 유지비용을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딜레마를 지목했다. 캐나다의 역사가인 마이클 이그내티에프는 이렇게 썼다. '제국의 부담은 장기적인 것이지만, 민주주의는 시간이 없어서 언제나 서두른다.' 독일의 정치학자 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진단도 비슷하다. '비용에 대한 질문, 즉 제국적 정책의 효용과 부담 사이의 관계는 민주적 제국의 핵심 문제다.'

ⓒ미태평양 사령부 홈페이지 : 트럼프는 ‘미국이 국제 무대에서 자원을 낭비한다’고 본다. 위는 미국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선단.

미국이라는 ‘제국’은 이 문제를 대체로 정치 엘리트의 합의('국제 공공재 공급이 장기적으로 더 이익이다')에 기대어 해결해왔다. 그런데 분노한 유권자의 등장으로 엘리트의 합의가 공격받고 있다. 트럼프는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하겠다고 시사하고 중국 제품에 터무니없는 관세를 물리겠다고 내지른다. 국제 질서의 근본 원리를 뒤흔드는 접근법이 쏟아진다. 본심이든 허세든, 트럼프는 '더 이상 제국의 통치 비용을 내지 않겠다'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국제정치학자인 이근 교수(서울대 국제대학원)는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현상은 미국 국내 정치의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미국의 대외정책을 세계가 예측하기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패권국 정책의 불확실성은 자체로 국제사회에 큰 비용을 발생시킨다. 결국 세계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국제사회의 안정성도 영향을 받는다.'

이제 미국은 이 기괴한 후보를 떠받치는 분노한 유권자의 크기가 얼마나 될지를 두고 11월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현 구도로 간다면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하는 관찰자가 많지만, 미국은 대선 투표율도 50% 언저리로 낮은 국가다. 만약 이 분노가 기존에 투표하지 않던 유권자까지도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괴력을 발휘한다면, 그때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전망도 있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역사가였던 아서 슐레진저는 2차 대전 직후 불어닥친 매카시즘 광풍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썼다. '미국은 잊을 만하면 민주주의를 벼랑 끝으로 밀어넣고 흔든다. 그리고는 다시 뒤로 잡아당겨 구출한다.' 이것은 대가의 통찰일까 그저 애국심에 취한 낙관일까. 우리 시대가 검증해볼 기회를 얻었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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