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혐사회' 속에 산다]② 맞서 싸우는 여성들

김형규 기자 2016. 5. 24. 22: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일상 속 폭력’에 슬픔 대신 저항을 택하다

시민청 추모공간 찾은 시민들 24일 서울 중구 시민청을 찾은 시민들이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글들을 읽고 있다. 이 쪽지들은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어 있다가 지난 23일 옮겨졌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무고한 여성이 희생당한 강남역 살인사건의 후폭풍이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슬픔과 추모에서 분노와 행동으로 이어지는 2030 여성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공유하며 꾸준히 저항의 목소리를 내온 최근의 흐름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주제어) 달기 운동이다. 한 트위터 이용자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드센 여자’라는 사회적 낙인에 맞서 권리 찾기에 나선 젊은 여성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여성주의자 선언은 여성단체 회원 가입과 이론 학습 등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졌다. 한국여성연합은 지난 3월 ‘세계 여성의날’을 기념해 이 운동을 ‘올해의 성평등 디딤돌’ 수상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부터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는 ‘메갈리안’은 여성 혐오에 정면으로 맞선 사례다. 디시인사이드 ‘메르스갤러리’를 거점으로 세력을 형성한 이들은 ‘미러링’(거울에 반사하듯 혐오 표현을 되돌려주는 것) 전략을 구사한다. 남성들이 ‘김치녀’라는 말로 한국 여성을 비하하면 이를 ‘김치남’ ‘한남충’으로 바꿔 쓰고, ‘가슴 작은 여자’에 대한 비난은 ‘성기 작은 남자’라는 표현으로 되갚아주는 식이다. 이들의 운동 방식은 혐오의 악순환을 만든다는 일각의 비판이 나왔지만 많은 여성들의 호응을 받았다. 여성 혐오가 일반화된 한국 사회에서 인식의 전복이 가져다 준 통쾌함이 그만큼 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최근 이어진 이 같은 여성들의 집단행동은 주로 온라인을 통해 확산됐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SNS를 통한 학습과 전파 효과가 영향을 많이 미쳤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익명성에 기반한 SNS를 통해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성차별이나 성폭력의 경험을 빠르고 광범위하게 공유하다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문제가 정말 심각하구나’라는 자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번화가 한복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가만 있어선 안되겠다’는 폭발로 이어졌다.

여성학자 박이은실씨는 “일상의 곳곳에서 폭력의 위험에 노출된 젊은 여성들에게 여성 혐오는 피부에 와닿는 실존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면서 “이들이 자발적으로 집단을 형성하며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SNS를 소통의 도구로 삼은 덕이 컸다”고 지적했다.

여성 혐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20·30대 여성들은 대학에서 여성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사회운동 등에 참여하던 과거의 전통적 페미니즘 운동과도 다소 거리가 있다. 이들은 데이트 강간 등 성폭행과 몰카 촬영 모의가 이뤄지던 소라넷 사이트 폐쇄를 위해 관련 법규를 공부하고 관계기관에 신고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이 겪는 고통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고 자생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생겨났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도 덩달아 판매량이 늘었다. 지난해 번역·출간되며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레베카 솔닛의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대표적이다.

여성들에게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 혐오 문제에 대한 공감·반감을 측정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다. SNS에는 이번 사건을 대하는 남자친구의 반응에 실망해 이별했다는 여성들의 증언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 반대로 ‘여자친구가 겪어온 불안과 고통을 그동안 이해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털어놓은 한 남성의 익명 페이스북 글에는 수천개의 응원 댓글이 달리고 2만여명이 ‘좋아요’를 누르기도 했다.

엄혜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는 “평소 성별 갈등을 맞닥뜨리기 힘든 오프라인과 달리 유독 온라인에서 남녀 간에 날것의 긴장 상태가 만들어지고 여성들의 집합 행동이 나타나는가에 대해 앞으로 보다 엄밀한 학문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