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인터뷰] "저 한국 사람입니다" 간절한 프로의 꿈, 명지대 주긴완

맹봉주 2016. 5. 24.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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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맹봉주 기자] 명지대 4학년 주긴완(26, 196cm). 그는 현재 대학리그 선수 중 가장 독특한 이력을 지닌 선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홍콩에서 귀화한 한국인이라는 점. 홍콩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긴완이 태어난 곳은 서울 목동. 하지만 생후 3개월 만에 홍콩으로 건너가며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때문에 그의 한국말은 다소 어눌한 편.

두 번째로는 농구를 시작한 시기다. 보통의 선수들이 초등학교 4`~6학년 때 농구를 처음 접한 것과 달리, 주긴완은 18살에 농구를 처음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얼마 전 은퇴한 코비 브라이언트(38, 198cm). 

“홍콩에 청소년리그라는 게 있어요. 그 리그에서 잘하는 선수 20명에게 코비 브라이언트가 하는 아시아 투어 이벤트에 참가할 기회를 줬어요. 코비가 일대일 할 선수를 직접 골랐는데 운이 좋게 제가 선택 됐어요. 코비와 일대일을 한 후 여러 곳으로부터 ‘농구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가 많이 왔죠.”

그 이전까지 주긴완은 한국의 일반 중, 고등학교 학생들처럼 좋은 대학을 가기위해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농구는 그저 단순한 취미활동에 불과했다.

“코비와 일대일 농구를 하기 전만 해도 그냥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어요. 꿈이요? 수업이 빨리 끝나는 게 꿈이었죠(웃음).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학원 다니며 공부하다보니 특별히 꿈이랄 게 없었어요. 그 당시 부모님의 마음은 정확히 모르겠어요. 부모님은 아마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게 공부든 운동이든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한참이나 늦게 시작한 농구지만 그의 재능은 남달랐다. 농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홍콩청소년국가대표에 뽑히며 그 실력을 인정받은 것. 주긴완은 여러 유소년 캠프를 통해 실력을 쌓아가며 홍콩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망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홍콩에는 프로리그가 없어 프로선수를 꿈꾸려면 다른 나라로 가야만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홍콩 출신 농구선수들은 중국농구리그인 CBA에 진출한다. 하지만 주긴완의 선택은 달랐다. 이번에는 78년생으로 코비와 동갑내기인 이승준(38, 205cm)이 그의 옆에 있었다.

“2011년 중국 난징에서 동아시아대회가 열렸어요. 전 홍콩대표로 뽑혀 대회에 나갔는데 한국과도 경기를 했어요. 그때 맞상대했던 선수가 (이)승준이 형이에요. 승준이 형이랑은 경기 후 자연스레 친해졌어요. 연락도 많이 하고요. 승준이 형이 한국의 KBL은 아시아에서 엄청 좋은 리그니까 도전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승준이 형이 저를 한국에 연결해줬고 한국 대학에서 제 플레이를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프로선수를 꿈꿨던 주긴완은 결국 한국행을 결정한다. 홍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년에 한, 두 번은 꾸준히 한국을 방문했기에 한국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농구가 아니어도 할머니의 나라 한국으로의 귀화는 그의 머릿속에 예전부터 있어왔던 생각이었다.

“농구를 직업으로 삼고 싶었어요. 홍콩은 프로가 없어요. 한국은 농구를 직업으로 인정해주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국행에 대해선)고민 없었어요. 그 전에도 한국에 오고 싶었거든요. 할머니 때문에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는데...제 기억 속에 가장 좋은 사람이 할머니에요. 할머니가 저에게 엄청 잘해주셨거든요. 할머니를 보러 한국에 오고 싶었어요. 제가 상하이에서 경기를 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이후부터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할머니를 위해서요. 한국에서 성공하고 싶었어요. 제가 아기 때 할머니가 ‘한국에 살아라’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어릴 때니 아무 생각 없었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마음속으로는 한국행을 결정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2012년, 주긴완은 프로선수를 향한 부푼 마음을 안고 명지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한국생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홍콩과는 다른 문화, 낯선 환경이 그를 힘들게 했다.

“적응이 쉽지 않았어요. 특히 합숙하는 게 힘들었죠. 다른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합숙을 해왔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 해봤거든요. 아마 합숙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한국밖에 없을 걸요? 팀을 위해선 따라야 하지만 개인 자유시간이 없어 정말 힘들었어요. 또 대부분의 선수들은 어렸을 때 기본기를 배웠잖아요. 저는 농구를 늦게 시작해서 기본기가 많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남이 한 번하는 걸 저는 열 번을 하면서 노력했죠.”

힘든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긴완은 한국에 오기 전 주로 스몰포워드로 뛰었다. 하지만 골밑 자원이 부족한 명지대에선 파워포워드, 센터로 뛰는 시간이 많았다.

“포지션을 바꾼다는 것도 힘들었죠. 하지만 제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잖아요. 어떻게든 팀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 같아서 리바운드나 궂은일에 더 신경 쓰려고 해요.”

 

포지션 변경 뿐 하니라 떨어지는 팀 전력 상 그가 공격에서 짊어져야할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현재 명지대는 1승 7패로 대학리그 최하위에 그쳐있다. 홍콩에서 승리에 익숙했던 그가 계속되는 패배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렇게 이기는 게 힘든 줄 몰랐어요. 요즘은 한 경기, 한 경기 승리가 정말 소중하다는 걸 느껴요. 팀 전력이 아쉬운 것 보다는 제가 팀에게 뭘 더 해줄 수 있나 그걸 생각해요. 제가 동료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만을 생각하죠.”

주긴완에 대한 주위의 평가를 생각하면 의외의 대답이었다. ‘개인기에 의한 농구만 하려고 한다, 팀플레이에 녹아들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오해였을까?

“제가 팀 농구보다는 개인기 위주의 농구를 좋아하긴 해요. 팀플레이와 수비에 약점도 있고요.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단점들을 고치기 위해 연습을 더 하고 있어요.”

4학년인 주긴완은 올해 열리는 프로농구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할 예정이다. 지난 신인드래프트를 유심히 본 농구팬들이라면 눈치 챘겠지만 사실 그는 지난해 1년 일찍 프로무대에 도전장을 내민 경험이 있다. 하지만 어느 팀의 지명도 받지 못하며 1년 후를 기약해야했다.

“솔직히 뽑힐 거라 기대했는데 떨어져서 실망했죠. 처음엔 왜 안 뽑아주나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제 문제도 컸던 것 같아요. 솔직히 이번 드래프트 자신 없어요. 그래서 드래프트는 생각안하고 남은 대학리그 경기에만 집중하려고 해요. 끝까지 열심히 하려고요.”

프로선수를 꿈꾸며 선택한 한국행이었다. 애써 담담하게 자신의 심정을 얘기했지만 표정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프로행이 좌절되며 찾아온 상실감은 주긴완에게 상상이상으로 큰 듯했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이번 드래프트에도 지명을 받지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아직 기회는 남아 있잖아요. 끝까지 해보고 안 된다면 다른 길이 나오겠죠. 어차피 도전하려고 왔어요. 도전이니까 안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다만 후회 없이 하고 싶어요. 이번이 내 마지막 도전이니까. 후회 안하고 마지막 남은 대학 1년을 멋있게 마무리 하고 싶어요.”

 

2년 전 점프볼과의 인터뷰에서 주긴완은 한국에서 제일가고 싶은 곳으로 경복궁을 꼽은 적이 있다. 주긴완에게 그 사이 경복궁을 가봤냐고 묻자 “아직 못 갔어요. 같이 갈 사람도 없고 갈 기회도 없었어요. 지금은 경복궁이 아닌 프로를 가고 싶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얼마나 프로선수에 대한 간절함이 큰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한국행을 결정한 거에 대해 후회는 없어요.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고 농구도 배웠으니까요. 정말 프로에 가고 싶어요. (프로팀 관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저를 뽑아주세요. 어떻게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할게요.”

주긴완은 자신에게 농구란 ‘희망’이라고 했다. 할머니, 어머니의 나라에서 한국인으로 살지만 외부인이라는 편견도 동시에 겪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자, 한참을 고민하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설사 프로에 가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남은 대학리그 경기에 최선을 다할 거 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저 한국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도 한국 사람이에요. 저 한국 사람이에요. 저를 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진_신승규 기자, 유용우 기자

  2016-05-24   맹봉주(realdeal@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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