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여자화장실 쓰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백철 기자 2016. 5. 2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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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고충, ‘성중립 화장실’ 대안 공간 고민해야

MTF(male to female·남성에서 여성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인 장희은씨(30)는 지난해 말 2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입사 면접 당시 장씨는 미리 자신이 트랜스젠더 여성이라고 밝혔다. 입사 당시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기 시작한 터였던 장씨는 여성스러운 머리모양과 옷차림을 하고 출근했다.

회사 동료 중 장씨에게 “왜 네가 그렇게 사는지 난 죽어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대체로 장씨를 ‘희은’이라는 여자 이름으로 불러주며 겉으로는 여자로 대했다. 일상에서 장씨는 여자로 살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여자 취급을 받지 못했다. 화장실 문제다.

“제가 여자인데 몸만 남자로 태어난 거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준 사람은 몇 명 없었어요. 제가 여자화장실을 써도 상관없다며 말해준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엔 반대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회사를 다니는 내내 남자화장실만 써야 했죠. 화장실을 쓰러 온 외부인이 머리 기르고 치마 입고 서 있는 절 보고 깜짝 놀란 것도 여러 번 봤어요”

장씨도 여성의 모습으로 남자화장실에 들락거리는 게 편치 않았다. 그래서 같은 건물의 위층 회사가 쓰는 여자화장실을 이용한 적도 있다. 며칠이 지난 뒤 위층 회사의 남자 직원이 장씨를 찾아와 “우리 여직원들이 불편해하므로 오지 말아달라”는 말을 전했다.

장씨는 “트랜스젠더를 현실에서 볼 기회가 잘 없으니 제 존재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죠. 제가 정말 이상한 사람인지 대화를 나눠보면 오해와 편견이 없어질 수도 있는데, 그냥 자신들 눈에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많이 접하죠”라고 말했다.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사용 문제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훨씬 논쟁적인 주제다. 2014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시의회에서 성적 지향이나 인종, 장애 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휴스턴 평등 권리 조례’(일명 ‘HERO법’)를 제정한 것이 논란의 시작이다.

법적 분쟁 끝에 HERO법은 주민 찬반투표에 부쳐졌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 미국의 유명 인사들이 HERO법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2015년 11월 휴스턴 시 주민투표를 통해 HERO법은 폐기됐다. HERO법을 반대한 인사들은 이 법을 ‘화장실 법’이라 불렀다. 트랜스젠더 여성(MTF)들의 여자화장실 사용을 막지 말자는 조례의 취지를 ‘남자들이 마음대로 여자화장실과 탈의실에 드나들며 여성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것’이라는 논리로 비틀었다. 전직 메이저리그 선수 랜스 버크먼이 이런 논리를 설파하는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새해가 밝았지만 논란은 계속됐다. 올해 3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은 ‘공공시설에서의 사생활과 보안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같은 주의 샬럿 시의회에서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례를 통과시킨 지 한 달 만이었다. 새 법률안은 출생신고 당시 등록한 성에 맞는 화장실만 이용하도록 규정했다. 비슷한 시기 사우스다코타주에서도 노스캐롤라이나주와 비슷한 취지의 법률안이 주 상·하원을 통과했으나, 3월 1일 데니스 도가드 주지사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소식이 알려지자 미 연방정부는 미국 전역 공립학교에 트랜스젠더 학생들의 성 정체성에 맞는 화장실 이용을 보장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의 한 대형 할인마트도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사용 권리를 지지한다고 밝히는 등 미국 사회 전반으로 ‘화장실 논란’이 퍼졌다. 최근 3년 사이 미국 50개주 가운데 7개주에서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사용권을 둘러싼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고려대 역학연구실 이호림 연구원 등이 ‘보건사회연구’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한국의 트랜스젠더 숫자는 5만~25만명으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의 2~3%가량인 성소수자 인구 중에서도 소수인 셈이다. 숫자가 적어서인지 2006년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실과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의 ‘성전환자 실태조사’ 이후 한동안 트랜스젠더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미국에서 HERO법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었던 2014년 12월, 한국에서도 오랜만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실태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국가인권위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 성소수자 차별실태 조사를 의뢰했고, 공감 측은 2014년 12월 보고서를 완성했다. 이 보고서는 화장실뿐만 아니라 의료기관, 종교기관, 신분증 문제 등 일상에서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 실태를 광범위하게 담았다.

인권위 보고서에 따르면 트랜스젠더의 경우 조사대상 77명 중 44.2%가 공중화장실을 사용하면서 불쾌한 시선이나 발언을 듣거나 이용을 제한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경우 과반수가 공중화장실 이용 도중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전체 트랜스젠더의 51.9%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려다 결국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동성애자·양성애자 중 공중화장실 이용에서 차별을 경험한 비율이 12.9%인 것과 비교된다.

2014년 10월 ‘장애여성공감’이 발표한 자료집에선 화장실 이용에 곤란을 겪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 ㄱ씨는 “성희롱 같은 법적인 문제까지 갈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남자화장실을 가거나 (볼일을) 참는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남성 ㄴ씨는 “성기수술을 하지 않으면 소변기에서 소변을 눌 수 없기 때문에 (대변기 칸에 들어가) 배 아픈 척을 한다. 남자가 칸에 들어가서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많은 고민들을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인권위 실태조사에 참여했던 박한희 SOGI법정책연구회 연구원(31)은 “트랜스젠더뿐만 아니라 외견상 남녀 성 이분법으로 나누기 어려운 많은 이들이 화장실 이용에 고통을 받고 있다”며 ‘성중립 화장실’을 대안 중 하나로 제시했다. 성중립 화장실은 성소수자나 장애인 등 통상적인 화장실을 이용하기 어려운 계층을 배려한 화장실이라는 면에서 일반적인 남녀공용 화장실과는 차이가 있다. 다목적 화장실로 부르기도 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인 박 연구원은 “인권위 실태조사만 봐도 맘놓고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사람이 수만명이 넘는다. 최소한 공공시설에서만큼은 수만명이 차별과 고통을 겪지 않고 맘편히 갈 수 있는 대안적인 공간을 늘려나가는 방향으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며 “미국에서의 논란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본격적 논의가 시작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희은씨는 올해 2월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새 직장의 화장실은 남녀공용이었다. 장씨 화장실 사용에 눈치를 주는 사람이 없어 한결 마음이 편하다며 “새 직장에서는 이미 2년 정도 트랜지션(성전환) 과정을 거친 제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에 예전 직장 사람들만큼 마음이 많이 닫혀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발생한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보듯, 남녀공용 화장실도 ‘안전한 화장실’이 아니다. 장씨도 트랜스젠더 여성도 맘놓고 여자화장실을 쓰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여자가 여자화장실을 이용하는 게 당연한데, 예전 직장에선 제게 ‘남자화장실을 써야 해서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어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저희를 100% 이해할 순 없겠지만, 저희의 진심에 눈과 귀를 조금만 열어 준다면 화장실 문제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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