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습니다" 공감의 장 된 신촌 필리버스터

임주언 기자 입력 2016. 5. 2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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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서울 서대문구 유플렉스 신촌점 앞 광장에서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시민들이 참가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임주언 기자

“대략 10년 전쯤 얘기에요. 12살 때요. 근데 이렇게 까마득한 먼 옛날 일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아동 성폭력의 생존자이자 피해자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듯이 살아남았고요.”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유플렉스 신촌점 앞 광장에서 다양한 여성들이 증언의 마이크를 잡았다. 범죄행위부터 일상적 폭력까지 범위는 넓었다. 스스로를 아동 성폭력의 생존자라고 표현한 한 참가자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중간 중간 옛 기억에 괴로운 듯 말을 멈추기도 했다. 그 때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녀는 “학원을 마치고 일찍 집에 가기 위해 가로질러 가는 길을 가다 남녀 공용화장실에 들어갔다”며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커터 칼을 든 남성 두 명이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울지 않으려 미리 대본을 주비해왔다던 이 참가자는 사람들의 지지의 눈길에 결국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는 여성들의 공감과 소통의 장이었다. 그간 주변사람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수십 명의 여성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어릴 적 여성스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오빠에게 몇 년간 괴롭힘을 당했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가 따라주는 술이 더 맛있지 않느냐며 남자 동기들에게 술을 따라줬다” 터져 나오는 자기고백에 공감의 박수가 쏟아졌다.

일부러 필리버스터를 보러 일산에서 왔다는 김모(22·여)씨는 “강남역 추모현장에 가보지 못해서 발언하시는 분들 얘기 듣고 공감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앞에 앉아 누구보다 열심히 박수를 쳤다. 김씨는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열리는 추모집회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했다.

밤이 깊어갔지만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자리를 지키던 남성 두 명이 발언대에 서자 분위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한 남성 참가자는 “저는 술에 취해 지하철을 타면서도 누가 날 만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는 새 누군가는 맨 정신에 택시를 타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라며 반성의 목소리를 전했다. 100명 남짓 모인 인원 중 40명가량이 남성이었다.

“저도 오늘 아침에 운이 좋아서 산 거였더라고요.” 이날 필리버스터에 참여할 계획이 없었다던 한 참가자는 “아침에 지하철역에서 어떤 남자가 급하게 휴대전화를 빌려갔는데, 다시 받아보니 메시지 창에 ‘너도 운이 좋아서 산거야’라고 적혀 있었다”며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서있는 지하철역이 ‘강남역 10번 출구’와 겹쳐 보였다고도 했다. “아침에 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난 다음부터는 ‘정말 그 일이 내 일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필리버스터는 밤늦도록 계속됐다. 21일 오후 5시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이번 ‘강남 묻지마 살인’으로 희생당한 피해자를 추모하는 문화제가 열린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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