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조심을 강요하는, 이 사회에 화가 난다"

2016. 5. 2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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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촌·강남역 증언대회 현장

‘나일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여성폭력에 대한 분노로 확산 

“충분히 조심하면서도 더 조심”
“피해 입고도 드러날까봐 묻어둬”

“두려움없이 공중화장실 갈 권리
밤늦게 안전귀가할 권리 누려야”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 거리에서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여성들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무섭고 두렵죠. 그러나 무섭고 두렵다고 택시를 피해서도 공중화장실을 못 가서도 안 됩니다. 야근도 하고 술도 마시고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로서의, 납세자로서의 권리를 100%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일 서울 신촌의 한 백화점 앞에 놓인 마이크 앞에 선 20~30대 여성들은 처음엔 주저했지만 또박또박 ‘이야기’를 이어갔다. 같은 시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20~30대 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성들도 눈에 띄었다.

옷차림도 다르고 마스크나 가면을 쓴 이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왜 여성으로서 그동안 항상 무서워해야 했나”라며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했다. ‘강남 살인사건’은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신촌에서 이날 오후 5시부터 새벽 1시까지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와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공포와 불안을 털어놨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마이크를 잡은 한 30대 여성은 “고등학교 수업이 끝나고 버스에서 누군가 몸을 만지고 지나갔다. 정당하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사람이 나를 만졌다고 얘기하는 게 너무 무서웠다”고 말했다. 신촌 필리버스터에서 한 여성은 “12살 때 학원가 공중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술냄새가 풍기는 남자 두 명이 나를 붙잡았다. 다행히 도망쳤지만 그 이후로 어두운 골목길과 화장실을 잘 가지 못한다”고 ‘트라우마’를 털어놨다.

피해자이지만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고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피해자면서 피해 사실이 드러날까봐 묻어둡니다. 정당하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할 때 무섭습니다.”(강남역 10번 출구 한 여성) “주변에서도 여자가 밤에 혼자 돌아다니냐고 핀잔을 많이 준다. 내가 뭘 잘못했던 것인가. 여자들은 밤길을 돌아다니면 안 되는 것인가.”(신촌 필리버스터 20대 여성)

하지만 여성들은 ‘용기를 내자’고 서로를 위로했다. 신촌 필리버스터에 나선 한 여성은 “성범죄로 여성들이 죽어나갔을 때 내가 죽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방어기제 때문에 그 이후 긴바지와 긴팔만 입었다”며 “내가 하고 싶은 일 포기하고 싶지 않고, 짧은 치마, 빨간 입술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서는 용기를 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남역에선 “요즘에서야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느꼈는데 사실은 많은 여성들이 그것을 자기 입으로 얘기하지 못했다. 이제서야 제 언어를 찾게 된 것 같다”는 여성도 있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 공간에서도 일상에서 겪은 폭력을 ‘생존 경험’으로 얘기하는 여성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번 사건은 개인이 정신질환이 ‘있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차별과 불안을 경험한 여성들이 반응하는 사회적 맥락이 있는 것이다. 여성단체가 나선 것도 아니다. 거기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 과정 자체가 (여성 혐오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물꼬를 텄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수지 이재욱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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