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 겪고 20년, 한국은 '세월호'가 되어버렸다

조태성 입력 2016. 5. 20. 11:31 수정 2016. 5. 2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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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유족 구조대 간호사 등 59명 구술 기록 '1995년 서울, 삼풍'
서초소방서에서 촬영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 총체적 부실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듯 A동 건물 자체가 완전히 내려 앉았다. 동아시아 제공

“소설가는 사실을 픽션인 양 내놓아도 창조성이 있다고 인정받는다. 그러나 논픽션 작가는 픽션을 사실인 양 내놓으면 결국 오프라 쇼에서 십자가형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논픽션의 어려움을 토로한 미국 작가 데이비드 실즈의 너스레다. 누군가의 농담이 우리에겐 다큐가 된다. 해외에선 무슨 사건, 사고만 터지면 관련 책이 쏟아진다는 데 우리에겐 그런 문화가 없다. 아니 그나마 있는 것도 불편하게 여긴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를 다룬 공지영의 ‘의자놀이’(휴머니스트)에는 ‘경영의 기역자도 모르는 여자 소설가가 분식회계 의혹까지 들먹일 수 있느냐’는 시비가 따라다녔다.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실상을 알려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은 ‘노동여지도’(알마)의 저자 박점규씨는 “인기 없는 주제여서 출판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전 사건을 뒤쫓은 기록물이 나왔다. ‘1995년 서울, 삼풍’이다. 서울문화재단이 삼풍 사건에 대한 구술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이에 따라 5명의 ‘기억수집가’가 2014년 10월부터 2015년 7월까지 사건 관련자 108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출판사 동아시아는 기록하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책으로서 독자들에게 손쉽게 읽혀져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해서 책을 꾸미면서 108명 가운데 59명의 진술만 뽑아냈고, 박해천 동양대 교수와 정윤수 한신대 교수에게서 전체적 맥락을 짚을 수 있는 글 한 편씩을 각각 받았다.

붕괴 사건이 일어난 건 다들 ‘노태우’를 떠올릴 법한 6월 29일이다. 17시 52분 붕괴가 시작돼 5분만인 17시 57분, 지하 4층에 지상 5층짜리 백화점 A동 건물은 완전히 내려 앉았다. 기둥만 남고 각 층이 고스란히 아래로 떨어져 시루떡처럼 눌러 쌓였다. 한 해 전인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 안전이 그렇게도 강조됐음에도 일어난 사고였다. 사망자 502명에 부상자 937명,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단일 사고론 인명피해가 가장 큰 사고다.

그래서 먼저 책을 들면 4장 박 교수의 글 ‘백화점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부터 읽는 게 좋다. 강남 일대 백화점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성장기의 산물이다. 때는 바야흐로 소득이 오르고, 올림픽 개최가 다가오고 내수시장이 팽창하던 때다. 이 바람을 타고 삼풍은 1989년 등장했다. 1985년 기준 강남 거주 20대 이상 인구는 45만7,000명, 이 가운데 대졸 이상은 19만3,000명으로 42.2%였다. 1975년 16만9,400명 가운데 1만9,700명(12%)과 비교하자면 10년 사이 폭발적 증가다.

삼풍은 ‘생활형 백화점’의 시초다. “관리직에 종사하는 남편이 직장에 출근한 사이 집에 남겨진 젊은 가정주부들”을 백화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규모 문화센터와 증권, 보험, 부동산, 여행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센터”를 만들었다. 자기계발, 친목도모, 재테크에다 쇼핑을 묶는 것이다. 애초 단순 쇼핑센터로 설계됐다 나중에 5층까지 지어 올려 식당가를 배치하고, 넓은 공간감과 시야각을 만들어주기 위해 기둥을 기준보다 얇게 만들고 개수까지 아예 줄여버리게 된 이유다. 쇼핑을 위한 건물 가운데 엘리베이터보다 에스컬레이터가 중심이 된 최초 사례다. 동시에 참사를 가져온 이유이기도 하다.

구조 작업은 악몽이었다. 때는 본격 여름을 앞둔 6월 장마철이었다. 건물이 차곡차곡 무너져 내려앉다 보니 사체 훼손이 심했다. 먼지나 유독가스 등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혹시 모를 생존자를 위해 물을 뿌렸다. 지하엔 과일ㆍ야채코너가 있었다.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리 진행됐다.

한시가 급했다. 삐삐 쓰던 시절이었다. 한국이동통신 직원 신왈현씨는 1분 단위로 삐삐를 계속 울리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삐삐를 울려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잔해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혼란스러웠다. 도봉소방서 구조대장 경광숙씨는 아직도 눈물짓는다. 살려달라는 외침을 들었으나 끝내 구해내지 못한 기억 때문이다. 그 죄책감에 지금까지도 “색소폰을 배워서, 잘 하지 못하지만, 위령비에 가서 불어드린다.” 강남성모병원 간호사 조윤미씨는 붕괴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 집에서 뛰쳐나가 버스를 탔다. 무조건 병원 가야 한다는 말에 버스기사는 “다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이 분을 먼저 데려다 주겠다”고 승객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 버스는 분당에서 병원까지 논스톱으로 달렸다.

그러나 대규모 재난은, 이런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마침 사고 당일은 최병렬 관선시장와 조순 초대 민선시장이 바통 터치하는 날이었다. 대규모 재난사고를 치뤄 본 경험도 없었다. 혼선을 겪었다. 응급의학 전문의도 없었다. 몰려드는 환자를 병원마다 어떻게 분담할 지도 갈팡질팡이었다. 가족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저 이 병원, 저 병원을 유령처럼 떠돌아다녀야 했다.

떡떡시루처럼 각 건물의 층이 완전히 내려 앉았기 때문에 시신 수습 등의 작업이 극히 어려웠다. 동아시아 제공

수습한 시신도 문제였다. 훼손과 부패가 심하니 알아보기 어려웠다. 사체 한 조각을 가지고 서로 자기 가족이라 싸우는 일은 흔했고, 이미 장사까지 치렀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의 가족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었다. 서초서 강력반장 고병천씨는 지금까지도 “시신에 대한 예의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도, 늘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나마 어떻게든 시신을 수습한 가족에겐 “축하한다”는 인사가 건네졌다. 붕괴 사고 한 달이 다 되어가던 7월 18일 시신 없는 희생자 수가 200명에 달했다. 건물 잔해를 치우다 휩쓸려 갔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유족들은 건물 잔해가 버려진 난지도로 건너가 잔해 사이를 뒤지고 또 뒤져야 했다.

지금 유족은 어떤 심정일까. 손상철씨의 말이다. “‘내년이면 괜찮아질 거다, 몇 십 년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가 아닙니다. ‘몇 십년 후엔 더 힘들어질 거다’입니다. 그런데 꼭 남기고 싶어요, ‘그러나’라는 단어를요.” 이어 말했다. “‘그러나’ 다음에 올 단어는 10년 후 제가 만들어가야겠죠. ‘그러나 어떻게 됐더라’하고. ‘그러나’라는 단어가 제일 좋은 거 같아요.”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러나 세월호’가 되어버렸다. 출판사 동아시아는 “그래서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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