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작침] 36년 전 반박 된 '5·18 북한 개입설'

박원경 기자 2016. 5. 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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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괴망측하다. "이런 일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할지 몰라도, 더한 일도 일어났다. <5·18항쟁①왜곡의 실체'극우인사-일베'의 분업>기사에서 보도했듯 5.18 민주화운동의 왜곡이 바로 그렇다. “한 문장만 있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한 나치 선동가 괴벨스. 악마로 평가받는 그조차 “99%의 거짓과 1%진실을 배합하면 100% 거짓보다 훌륭하다”고 말했지만, 5.18 역사 왜곡은 1%의 진실도 없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광주 태생의 시민에게 단 하나의 근거도 없이 5.18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북한 특수군’이라고 지목하는 방식이다.

5.18 항쟁에 대한 왜곡 방식과 결과는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말과 궤를 같이한다. “이왕 거짓말을 하려면 최대한 크게 하라”는 괴벨스의 말을 충실히 따랐고,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반박에는 수많은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고, 반박하려 할 때면 이미 사람들은 선동돼 있다”는 말은 5.18 왜곡의 결과로 귀결됐다. 무대응이 논란을 줄일 수 있다며 5.18 왜곡에 조치를 취하지 않는 사이, 0.1%의 진실조차 없는 거짓에 ‘의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확대 재생산된 의혹은 어느새 담론이 됐고, ‘논쟁거리’라는 제목까지 달게 됐다. 역사의 진실은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왜곡된다는 말처럼 1988년 광주청문회, 1995년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5.18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지만,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5.18에 대한 역사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5.18을 모르는 세대들이 생겨났다. 이런 ‘망각’의 틈을 타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은 전염병처럼 퍼졌고 불행하게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에 반박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됐다.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5·18항쟁①왜곡의 실체> 기사에 이어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 왜곡 담론의 실체를 분석했다.

● 5.18 진실: '민주화 요구'에 대한 '전두환의 내란 목적 살인'

‘5.18(1980)’은 민주화 운동이다. 진실 발견에 시차가 컸지만, 8년 뒤 열린 광주 청문회, 5.18특별법(1995), 이듬해까지 이뤄진 검찰 수사와 5.18 국가기념일 제정(199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진상규명(2007),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2011)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시민운동으로 거듭 확인됐다.

5.18민주화 운동의 개요는 이렇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신군부 세력인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 씨를 중심으로 내란이 일어났다. 12.12 쿠데타(1979)다. 군(軍) 주도권을 장악한 전두환 씨는 ‘국회 해산,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골자로 한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개입 계획이었다. 5.18 하루 전날인 17일, 신군부는 병력을 동원한 상태에서 국무회의를 열게 해 시국수습방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정치활동 규제, 집회 전면 금지, 언론 통제, 전국 대학 휴교’ 내용이 담긴 포고문 10호를 발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이후,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까지 했던 시민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였다.

시민들은 또다시 등장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5월 18일 광주 시민 역시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런데 전두환 씨는 자신의 정권 찬탈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해 광주 시민의 시위를 강경 진압했고, 이를 위해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전 씨 주도로 이뤄진 살인행위에 대해서는 뒤늦게 반란수괴, 내란 목적 살인죄 등이 적용됐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 씨의 모든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며 사실 관계를 명확히 했고, 전 씨에 대한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 1980년 '신빙성無' 결론 내린 '북한 개입설'

지금까지 내려오는 북한 개입설은 <5·18항쟁①왜곡의 실체>에서 보도했듯 1980년 5.18 항쟁 당시 전두환 씨 등 반란 세력이 시도한 왜곡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왜곡 배경엔 전두환 씨 등 반란 세력의 정당성 확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왜곡은 진상 규명을 통해 거짓이라는 게 입증됐고, 실제 5.18항쟁 당시 기록들도 이를 명확히 증명한다.

북한 개입설의 근원은 1980년 신군부가 유포한 북한 남침설이다. 지금도 등장하는 이른바 북풍(北風)이다. 군병력을 이용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 서리를 맡았던 전두환 씨는 계엄확대를 위해 ‘북괴 남침설’ 정보를 생산했다. 정보 출처는 일본 내각조사실이라고 밝혔는데, 내용은 이랬다. "한국에서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르는 5월 15일~20일 사이 남침 강행 결정".

중앙정보부는 이런 첩보로 전 씨 등 신군부의 정치개입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는 명분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첩보의 진위를 판단하는 육군본부는 당시에 이미 ‘신빙성 없음’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1980년 5월 10일 작성한 <북괴 전면 남침설 분석>을 보면 이런 내용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타국(유고) 방문 중 침략 모의 가능성 희박, 남침 예정이라면 각료는 대동치 않음, 북한군 병력 집결 징후 없음. 전쟁 징후 없고, 남침설 신빙도(신뢰도) 희박"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군(軍) 스스로 거짓 정보라고 인정한 것이다. 심지어 당시 계엄사령부 참모 회의록에선 “북괴(북한)가 남침을 준비한다는 일본 첩보는 벌써 6번이나 거짓말”이란 취지의 당시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겸 계엄사 부사령관 발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전 씨 등은 이런 신빙성 없는 남침설을 이용해 5.18항쟁 이후 “고첩(고정간첩)과 불순 인물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했다”는 담화문을 발표해 민주화 운동을 북한을 배후로 한 난동 또는 폭동으로 몰아갔다. 언론 통제를 통해 거짓을 사실로 만들려 했다. 전 씨 등 계엄군은 1980년 5월 24일 남파간첩이 검거됐다는 발표까지 했다. “5.18항쟁을 선동할 목적으로 독침까지 들고 남파된 간첩 이창용이 서울역에서 검거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거짓이었다. 뒤늦게 공개된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보면 이창용에겐 5.18과 관련한 임무는 애당초 없었고, 광주 잠입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났다.

● 과격 진압에 대한 시민의 정당한 저항

전두환 씨 등 계엄군은 5.18항쟁을 '소요사태, 폭동'으로도 몰고 갔다. ‘불순세력이 총기를 들고 군인을 공격하면서 발포까지 하게 됐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대 재생산돼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지만, 이미 당시 기록을 봐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당시 전남도청에서 작성한 <5.18항쟁사태주요사건 일지>에도 “군 공수부대 2백여 명 투입. 학생 및 학생차림 젊은층 무차별 구타 연행, 혹독한 진압 목격 시민, 흥분 분개”로 기록돼 있다. 군의 폭력적 진압이 자행되면서 시민들을 흥분시켰다는 것이다.

5.18항쟁을 호도하는 세력은 “시민들이 대검(大劍)을 장착한 총으로 군인들을 위협했고, 군은 대검을 장착하지 않았다”는 유언비어를 지속적으로 퍼뜨려 왔다. 그러나 당시 작성된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만 봐도 이는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상황일지엔  ‘7空輸隊銃劍鎭(7공수단 착검진압)’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공수단이 사용하는 M16 소총에 대검을 꽂고 진압을 했다는 뜻이다. 또 5.18항쟁 당시 착검을 한 채 누군가를 쫓아가는 사진을 두고 시민이 군인을 쫓아가는 것이라는 왜곡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착검을 한 사람은 ‘7공수여단 서모 중사’로 밝혀졌다. 이 외에도 5월 21일 13:00 시민들을 향한 집단 발포 이전인 19일에도 ‘고등학교 3학년 김영찬 군에 대한 계엄군의 총격’이 있었다는 수사기록도 이미 공개된 바 있다. 즉, 당시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과 총격이 선행됐고,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정당한 저항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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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윤 기자 (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분석: 한창진·안혜민(인턴)
디자인/개발: 임송이

※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방대한 데이터와 정보 속에서 송곳 같은 팩트를 찾는 저널리즘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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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경 기자seagu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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