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근로자들은 지금.. 그 길이 닫혔다 살길도 막혔다

입력 2016. 5. 14. 04:03 수정 2016. 5. 1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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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폐쇄 이후 180도 달라진 삶
개성공단 근로자로 일하다 실직한 서성길씨가 서울 영등포구 한 도배학원에서 도배 실습 교육을 받고 있다. 김지훈 기자
개성공단 주재원으로 일했던 김현윤씨가 지난달 2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서영희 기자

서성길(47)씨와 김현윤60)씨는 100일 전까지만 해도 일의 보람과 즐거움을 만끽한 행복한 서민이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고분고분하면서도 일을 시키면 똑소리 나게 하고, 보잘것없는 초코파이 하나에 미소를 짓는 공장 직원들은 그들에게 좋은 동료이자 삶의 활력소였다. 하지만 2월 10일 이후 서씨와 김씨의 삶은 극명히 바뀐다.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강제 휴직을 당하면서 길가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북한의 돈줄 역할을 했다는 일각의 비방에는 억울함으로 잠을 못 이룬다. 이들이 일했던 곳은 북한의 개성공단. 이념과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러나 점점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들의 남한에서의 24시를 쫓아가봤다.

# 도배기술 배워 재취업 고군분투

“몸 쓰는 일 쉽지 않지만 전향 결심… 정부 미리 귀띔이라도 해 줬다면”

◇생활비·딸 병원비 마련 위해
=지난 3일 오전 11시 서울 영등포구의 한 도배학원. 서성길씨가 3주 전부터 새롭게 출근하는 곳이다.

개성공단 의류공장에서 5년간 사무직으로 일했던 그는 2월 10일 개성공단이 문을 닫은 지 5일 만에 해고됐다. 이조차 회사의 통보가 없어 한 달 후에나 알게 됐다. 월급이 나오지 않아 3월 중순 회사에 찾아가니 “미안하게 됐다”며 해고됐다는 답을 들었다.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그동안 공장 관리, 총무 업무를 해왔던 그가 40대 후반에 몸을 쓰는 작업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고민 끝에 직업을 전향하기로 결심했지만 아내한테는 아직 비밀이다. 초보 도배 기사의 경우 한 달에 150만원 벌기도 빠듯하기 때문에 아내가 싫어할 것이 뻔했다. 작업복을 매일 아침 들고 가는 노트북 가방 안에 숨기는 이유다.

서씨는 연습용 나무 벽에 벽지를 바르고 있었다. 아직 손에 익지 않은 일이라 서툴렀다. 한 번에 붙이지 못해 뗐다 붙이기도 하고, 작업 도구가 손에 익지 않아 속도도 더뎠다. 중간에 실수로 벽지를 잘못된 방향으로 접기도 했다. 비가 와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서씨의 얼굴은 금세 땀으로 범벅이 됐다. 이날 서씨의 작업복은 노란색 아웃도어 점퍼에 등산용 바지. 그는 “작업복을 따로 사기 부담스러워 예전에 산에 갈 때 입던 옷을 가지고 다닌다. 이제 등산할 여유도 없고…”라며 머쓱해했다. 가로로 30㎝가량 되는 벽지를 겨우 하나 바르고 숨을 고르던 서씨는 “돈 주고 도배할 때는 몰랐는데 쉽지 않네”라며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의 턱에는 하얀 도배풀이 묻어 있었다.

일은 힘들지만 그는 이제 자신감이 좀 생겼다. 도배를 배우고 인력시장에 나가면 회당 5만∼8만원씩 수당을 받거나 업체에 들어가 일할 수 있다. 도배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밑천을 모아 개인사업장을 차릴까도 생각한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100일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인생 구상이었기 때문이다.

서씨는 개성을 나온 뒤 거의 한 달간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서씨가 거리로 나와 1인 시위를 시작한 것은 날이 풀리던 3월 중순쯤부터다. 그는 피켓을 들고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 나갔다. 피켓에는 개성공단 기업, 근로자의 피해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지난 3월 16일 개성공단 기업 관계자와 근로자들이 참석한 평화대행진에서는 정부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며 삭발식에도 참여했다. 서씨의 머리카락은 이제 5㎝ 남짓 자랐다. 그가 시위에 나서자 아내는 “찔러도 정부는 꿈쩍도 안할 텐데 뭐하러 하냐”고 핀잔을 줬다. 하지만 스물두 살 아들은 “아버지가 잘못한 거 아니니까 하세요”라고 격려했다. 시위를 시작할 때 쌀쌀했던 날씨가 반팔을 입을 정도로 풀릴 때 그는 도배학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위를 하던 두 달 동안에도 서씨가 구직활동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의류공장 다섯 군데를 노크했지만 면접도 보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에게는 당장의 생활비가 필요했다. 매월 나가는 주택대출 상환금 120만원과 지체장애가 있는 중학생 딸아이의 병원비 80만원 마련이 시급했다. 3월에는 5년간 부었던 주택청약저축을 깼다. 지난달에는 지인들에게 300만원을 빌려 급한 불을 껐다. 점심값 5000원과 왕복 교통비 2500원이 그가 하루에 쓰는 돈의 전부다. 도배학원비는 실업 중인 근로자 재교육비를 최대 200만원까지 지원하는 고용노동부 제도를 활용해 그나마 지출이 따로 없다. 그는 “학원이 끝나면 곧장 집에 돌아가 저녁밥 준비를 하고 청소를 해놓는다”며 “하루 지출을 7500원으로 정했는데 아는 사람을 만날 여유도 없다”고 말했다. 저녁밥 준비나 청소를 해놓는 건 학원에서 딸을 데려오는 아내 보기 미안해 눈치껏 하는 일이다. 서씨는 “정부에서 우리에게 미리 귀띔해주고 이해를 구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날 우산을 갖고 나오지 않은 서씨는 비가 그친 틈을 타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 광화문 1인 시위 두 달째 참여

“보상 얼마 받았냐 손가락질 억울… 가끔 알바… 살길 찾아 나서야죠”

◇피해 보상 외치는 1인 시위
=김현윤씨는 개성공단의 한 의류공장에서 8년간 법인장으로 근무했다. 8년의 세월은 처음에 경계하던 북한 근로자들의 마음도 열 만큼의 시간이었다. 처음에 낯선 작업에 서툴렀지만 자신의 지시를 고분고분 들으며 금세 일에 익숙해진 근로자들을 보는 것은 보람이었다. 김씨와 북한 근로자들은 어느덧 농담도 주고받게 됐다. 근로자들이 좋아하는 초코파이를 살뜰히 챙기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개성에서의 생활은 그만큼 만족스러웠다. 개성에 있는 김씨의 숙소는 옷가지, 신발 등 갖은 살림살이가 있는 또 하나의 정든 집이었다.

김씨는 개성공단 중단 조치가 발표된 다음날인 2월 11일 8년간 살았던 개성 숙소에서 슬리퍼만 신은 채 쫓겨나다시피 했다. 회사는 김씨를 휴직처리했다. 휴직 기간에는 다른 일을 하면 안 되지만 김씨는 가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나섰다. 실직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는 4대 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3월에는 부산의 한 교복 공장에서 10일간 일했다. 그는 지난달 말 동료 중 한 명에게서 삼척의 레일바이크 터널 보수공사를 하러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가고 싶었지만 가족들이 “그 나이에 터널 공사판은 어렵다”며 극구 반대해 생각을 접었다. 김씨 역시 3월 중순부터 광화문광장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섰다. 여기서 서성길씨와 안면을 트기도 했다. 지난달 28일 오전 11시, 광화문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하는 김씨의 왼쪽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피로 때문에 이틀 전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고 했다. 그늘 한점 없는 광화문광장에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려고 김씨는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점심시간이 되자 인근 직장인들이 쏟아지듯 나와 김씨 앞을 지나갔다. 그가 들고 있는 피켓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김씨는 “가끔 저쪽 (광장) 건너편에서 고엽제 피해자들이 시위하면서 우리 욕을 한다”며 “나라에서 보상받고도 더 달라고 한다고 비난하더라”고 말했다. 대뜸 “보상 얼마 받았소? 몇 천만원?”이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한다. 김씨는 “우리는 받은 게 없는데 사람들은 우리가 욕심 부리는 거라며 손가락질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시위에 20명 정도 참여했지만 이제 10명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일을 못한 지 100일이 다 되다보니 시위에 나오던 동료들도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중이다. 김씨가 충혈된 눈을 크게 뜨며 “이제 휴직수당이나 실업급여 받던 사람들도 정부의 6개월 지급 기간이 끝날 때가 다가오면 정말 힘들어질 건데.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죠”라고 말했다. 그가 피켓을 화단에 세워 두고 점심을 먹으러 나서자 뒤에 있던 의경이 “어디 가시느냐”고 물으며 쫓아왔다. 김씨는 “밥 먹으러 가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저 친구는 이제 나 알 때도 됐는데 매일 물어보네. 허허”라며 자리를 떴다.

오후 4시 시위를 마친 뒤 김씨는 집으로 향했다. 아내의 잔소리를 안 듣기 위해 집안일에 몰두할 시간이다. 다른 동료들도 “나도 마찬가지야”라고 맞장구를 치며 헤어졌다. 8년간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뒤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축 처져 있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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