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소 앞 시끌벅적 환영식.."국가는 왜 속옷을 벗겼나"

2016. 5. 1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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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륭전자분회장 벌금 대신 강제노역 석방된 날
서울구치소 정문 앞 “보고싶다 유흥희” 현수막
투쟁영상 담은 스크린까지 동원해 문화제 열어
수감날 강제로 속옷 벗긴 인권침해에 함께 분노

서울대공원은 서울에 없다. 경기 과천시에 있다. 서울시립승화원도 서울에 없다. 경기 고양시에 있다. 서울구치소는 어디에 있을까? 경기 의왕시에 있다. 서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지만 공간적으로는 서울 밖으로 밀려난 곳들이다. 공장에서 배제돼 노동을 할 수 없는 노동자가 서울에서 밀려난 의왕의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장면은 ‘절벽 아래 나락’이라고 해야 할까?

11일 오후 8시30분께 서울구치소 정문 앞 인도에 “보고싶다, 유흥희”라고 적힌 현수막이 나붙었다. 2005년부터 불법파견에 따른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12년째 투쟁 중인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의 석방을 반기는 내용이다. 유 분회장은 12일 전인 4월29일 벌금 150만원을 내기엔 너무 억울해 차라리 강제노역을 택하겠다고 밝힌 뒤 제 발로 입감됐다. 그는 분회원들을 고용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연락을 끊고 잠적한 최동열 기륭전자 회장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에 여러 차례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는 등의 행위를 한 혐의(주거침입)로 유죄가 확정됐다.

30여분 뒤 현수막 옆에서 문화제가 시작됐다. 몇 년짜리 징역도 아니고 14일짜리 노역을 마친 노동자 환영 문화제라기엔 70여명의 참가자와 유 분회장의 투쟁사진을 상영한 대형 스크린과 스피커 등 집회물품이 예사롭지 않았다. 경찰력도 1개 중대가량 출동했다. 한 참가자는 “누가 보면 15년 즈음 살다 나온 사람 환영하는 줄 알겠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경찰관도 “구치소 앞에서 이렇게 시끌벅적한 환영식을 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고 했다.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분회 분회장(가운데)이 12일 새벽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를 나서며 김소연 전 분회장(맨오른쪽)과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왼쪽 둘째) 등 동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유 분회장은 정규직 전환 합의를 깨고 야반도주한 최동열 대표이사에게 항의하다가 주거침입으로 고소당해 벌금형을 선고받은 데 대한 항의의 의미로 벌금을 내는 대신 지난달 29일부터 노역을 한 뒤 이날 출소했다. 의왕/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분회 분회장이 항의 노역을 마치고 나오는 12일 새벽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 앞에서 유 분회장을 기다리던 동료들이 정문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의왕/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노동자들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두 가지 이유였다. 유 분회장은 입감 직후인 지난달 29일 오후 여성 교도관 3명에 의해 강제로 속옷까지 벗겨지는 인권침해를 당했다. “마약 사범인지, 문신·수술자국이 있는지 등을 확인해야겠다”는 교도관의 요구를 거부한 뒤 벌어진 일이다.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에는 “교도관은 시설의 안전과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하면 수용자의 신체·의류·휴대품·거실 및 작업장 등을 검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마약사범 여부는 범죄기록을 보면 알 수 있으나 교도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문신이나 수술자국은 굳이 속옷까지 모두 벗겨가며 꼭 봐야 할 이유도 없다. 교도관들은 거의 대부분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이처럼 알몸 검사를 하고 있다고 유 분회장한테 말했다고 한다. “바로 옆에 가운이 있는데도 교도관들이 안내하기는커녕 달려들어 강제로 옷을 벗겨놓고는 나중에 ‘규정대로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는 게 2일 김소연 전 분회장 등을 접견한 당시 공개된 유 분회장의 증언이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과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관련 단체는 “이미 신체의 자유를 제한받은 ‘자유형’이 신체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는 ‘신체형’이 아니라는 점을 교도관들을 포함한 법무부는 상기해야 할 것”이라며 “서울구치소에서 비슷한 인권침해가 유 분회장 이전에도 숱하게 있었다는 현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구치소 강제 속옷탈의 검신 문제는 매우 무겁게 다뤄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노동자들을 분노케 한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구치소들의 경우, 석방날 새벽 0시 안팎에 풀어주는 것과는 달리 서울구치소는 정확하게 새벽 5시가 되어야 석방하기로 한 조처 때문이다. “부녀자들을 자정 넘긴 시각에 석방하면 범죄 피해 우려가 있다”는 서울구치소 쪽의 논리는 수십 명의 동료가 마중을 나온 상황에선 무색해지는 해명이다.

이날 김소연 전 분회장을 비롯한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3명,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콜트콜텍 등 관련 단체 관계자들이 떼로 몰려나온 데는 이런 배경이 놓여 있다.

이날 문화제는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민요가수 박선봉씨의 <목포의 눈물>, 민요가수 이석범씨의 <넘어가세>, 민중가수 이수진씨의 <아프게하지 마라> <일어나>, 이치현과 벗님들이 부른 <집시여인>의 가사를 이동수 화백이 세월호 사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잃어버린 7시간’ 관련한 가사로 바꿔 부른 <7시간> 등의 노래들은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문학계와 노동계를 넘나드는 활동을 벌이고 있는 노동시인 송경동씨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비롯해 김남주 시인의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1980년 12월 백기완 선생이 서대문구치소에서 지어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로 되살아난 시 <묏비나리> 등을 낭독할 때는 숙연한 분위기였다.

이날 유 분회장은 정확하게 오전 5시가 돼서야 여성 교도관 2명과 함께 서울구치소 정문을 나서 동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인삿말에서 “(알몸검신은) 내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구치소 쪽은 수형자가 변호사를 접견할 때도 검찰청·법원에 갈 때도 매일 위험한 무기가 나오는지 무엇을 감추는지 확인하면서도 ‘이런 행위가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한다”며 “내가 나올 때 방식구들이 ‘출소자 대기실에 가면 아무 것도 없다’며 먹을거리를 챙겨주고 ‘밖에 나가서도 싸우는 동지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앞으로 책임감을 갖고 더 씩씩하게 싸우겠다”고 말했다.

유 분회장의 진정을 접수한 국가인권위원회는 11일 유 분회장을 접견하는 등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이날 유 분회장의 인사말 뒤 사복경찰의 채증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져 경찰이 한 집회 참가자를 연행하려는 과정에서 양쪽의 집단적인 몸싸움이 2∼3분 동안 일기도 했으나 양쪽이 없던 일로 하기로 하면서 진정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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