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사건, 시그널을 찾아라](28)광주 여대생 테이프 살인사건

강현석 기자 2016. 5. 1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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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테이프에 감겨 살해당한 여대생…용의자는 잔인하고 치밀

그림|김상민 화백

그날 아침, 엄마는 딸을 위해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쌌다. 국립대 미술교육과 4학년에 재학 중인 딸은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부쩍 힘들어 했다. 전날 오후 9시까지 수업을 듣고 학교에서 돌아 온 딸은 피곤한지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식탁위에 도시락과 딸이 차비로 쓸 1만3000원을 놓아 두고 오전 8시55분 쯤 테니스동호회 월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12시간 뒤인 오후 8시20분 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도시락과 딸의 가방이 현관 앞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것을 봤다.

불길한 느낌이 온 몸을 감쌌다. 현관부터 시작된 핏자국은 딸의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방문을 열자 딸은 침대위에서 하의가 벗겨지고 테이프에 감긴 끔찍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었다. 머리에 칭칭 감겨있는 테이프를 뜯어내려는 순간,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급해진 엄마는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들었다. ‘112’를 눌렀다고 생각한 전화는 ‘119’로 갔다. 엄마는 “2004년 9월14일, 딸과 함께 나도 죽었다”고 했다.

2004년 9월 광주에서 발생한 여대생 테이프 살인사건에 쓰인 비닐테이프와 같은 종류의 테이프.

■비닐 테이프 감아 잔인하게 살해

광주 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김희수씨(가명·당시 22세)의 모습은 경찰도 고개를 돌리게 했다. 자신의 방 침대위에서 발견된 김씨는 양 팔이 등 뒤로 꺾여 머플러로 묶여 있었다. 하의는 모두 벗겨져 있었다. 충격적인 것은 머리와 얼굴이 종이상자 등을 붙일 때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비닐 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었다는 점이었다.

경찰이 테이프를 벗겨내자 얼굴 여러군데서 멍 자국이 발견됐다. 코피도 흘린 채 였다. 현관 입구에는 김씨의 책가방과 디지털 카메라, 도시락 등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핏자국과 김씨의 귀걸이도 발견됐다.

핏자국은 현관에서 김씨의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김씨의 지갑과 지갑 속에 있던 카드 등은 모두 방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범인이 한장, 한장 내용물을 살펴보며 빼 낸 것으로 추정됐다. 안방 서랍장은 열려 있었고 뒤진 흔적이 선명했다. 김씨 부모의 가방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없어진 것은 어머니가 ‘차비’로 놓아둔 1만3000원과 김씨의 휴대전화 뿐 이었다.

부검결과 김씨의 머리쪽 7곳에서 상처가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 상처가 누군가가 머리채를 잡고 김씨를 바닥에 부딪치게 해 생긴 것으로 추정했다. 우측 광대뼈 부위에 난 콩알만 한 상처와 입술안쪽과 코의 상처 등은 그녀를 수차례 때리면서 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상처들은 김씨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이 아니었다. 김씨의 직접 사인은 ‘비구폐쇄로 인한 질식사’. 머리에 칭칭 감긴 비닐테이프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해 숨진 것이었다. ‘잔인한 살인’ 이었다.

2004년 9월 광주 북구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여대생 테이프 살인사건의 현장. 아파트 현관입구에 사망한 여대생의 가방과 책, 도시락 등이 놓여있다.

■가족들 모두 나간 직후 이뤄진 범행

김씨는 사건 당일 오전 학교 수업이 있었다. 발견 당시에도 하의가 벗겨져 있긴 했지만 양말을 신고 있는 등 외출하려던 차림이었다. 어머니가 식탁위에 올려뒀던 도시락이 현관 입구에서 발견됐고, 책이 든 가방도 같은 곳에 있었다.

이를 토대로 경찰은 누군가가 현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김씨가 학교에 가기 위해 문을 연 직후 공격한 것으로 추정한다. 김씨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김씨가 문을 열어주자 집으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김씨의 집은 15층 아파트의 13층이어서 창문 등을 통해 대낮에 범인이 침입하기는 힘든 구조다.

김씨 아래층에 사는 주부는 “십자수를 하고 있는데 오전 10시부터 11시30분 사이에 위층에서 ‘꿍’ ‘꿍’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꽃집을 하던 위층 주민도 “오전 11시쯤 출근하려고 승강기를 기다리면서 아래층 계단을 봤는데 스포츠형 머리를 한 남자 2명을 봤다”고 경찰에 전했다.

부검결과에서도 김씨의 사망시각은 오전 9시에서 오전 10시 사이로 추정됐다. 현장에서 사라진 김씨의 휴대전화는 같은 날 오후 12시49분 광주 서구 월산동의 한 대학한방병원 인근에서 마지막으로 신호가 잡혔다.

김씨의 아버지는 오전 7시40분에 출근했고, 오빠는 다른 도시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가 테니스 동호회 모임을 위해 오전 8시55분 쯤 집을 나서면서 집에는 김씨만 남았다.

2004년 9월 광주 북구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여대생 테이프 살인사건 현장 약도. 당시 여대생은 자신의 방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태연히 컴퓨터까지…‘흔적 없는 범인’

범인은 김씨의 집에 최소 1시간30분 이상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이 김씨 방의 컴퓨터를 조사했더니 오전 10시쯤부터 1시간30여분 동안 누군가가 인터넷을 사용한 기록이 나왔다. 경찰은 이 시간, 이미 김씨가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망한 김씨를 침대에 둔 채 태연히 컴퓨터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경찰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범인의 다른 흔적은 없었다. 현관문을 포함해 집안 어디에서도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은 없었다. 발견된 지문 5개는 모두 김씨 가족 것이었다. 범인이 집안 곳곳을 뒤졌는데도 신발자국 등도 확인되지 않았다.

범인이 김씨를 성폭행 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김씨의 체내에서 남자의 유전자가 발견되긴 했지만 경찰은 DNA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경찰은 “남성 유전자가 발견되긴 했지만 유전자 분석을 할 수 없을 정도였고 이것만 가지고 성폭행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범행에 사용된 머플러와 비닐 테이프는 김씨의 집에 있던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김씨의 아파트는 당시 폐쇠회로(CC)-TV가 한대도 없었다. 이 아파트는 사건 이후에서야 CC-TV를 설치했다.

2004년 9월 광주 북구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여대생 테이프 살인사건은 현재 광주경찰청 미제사건 전담팀에서 수사하고 있다. 사진은 광주경찰청.

■경찰 “캐비닛 속 서류로 방치 안해”

경찰은 사건 이후 전담반을 편성 대대적인 수사를 했지만 특별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김씨의 친구들은 “4학년이 되면서 졸업 작품과 학과성적, 임용고시 준비 때문에 힘들어하긴 했지만 새로 사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등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면서 “누군가에게 원한 살 일이 없다”고 했다. 김씨는 사건 이틀 전 군에 있는 남자친구의 면회를 다녀오기도 했다.

경찰은 김씨의 전 남자친구 등을 포함해 11명의 DNA를 채취해 김씨의 몸속에서 발견된 남자 유전자와 비교하려고 했지만 DNA 판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범행 추정 시간 “대학 동아리방에 있었다”는 전 남자친구의 진술도 사실로 확인됐다.

경찰은 강도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나 변태성욕자나 정신장애자의 우발적 범죄 가능성도 수사했다. 500명이 넘는 통화내역을 뒤지고 성범죄 전과자 30명을 수사했다. 서울과 인천 등 테이프를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전국의 전과자 55명을 조사했지만 역시 성과는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이듬해 ‘미제사건’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경찰은 지금도 유사 수법의 범죄가 발생하면 이 사건과의 연관성을 캐고 있다. 사건을 넘겨받은 광주경찰청 미제사건 전담팀도 현재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문귀희 광주경찰청 미제사건전담팀장은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현재 새로운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캐비닛 속 서류로만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가슴이 답답하고 제가 죽을 것 만 같다. 처절한 내 딸의 모습이 정말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면서 “하루라도 빨리 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말을 경찰에 남겼다. 사건제보는 광주경찰청 미제사건전담팀 (062-609-2572). 다음 미제사건은 ‘울산 단란주점 살인사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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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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