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살무늬 한옥들, 일제 때 '업자'들이 지었다

2016. 5. 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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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란기의 서울 골목길 탐방

서울 돈암동 보문동 한옥골목 -중

(맨위)안채와 문간채로 구성된 김명신씨의 친가 한옥은 근대 한옥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크다. 좀더 나은 자재와 더 높은 지붕, 그리고 더 넓은 안마당을 볼 수 있다. 김씨가 이 근대 한옥의 역사와 건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래왼쪽)조계찬 부인이 말해 주었던 ‘굴도리와 부연’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김씨의 친가. (오른쪽) 2층 상가건축은 일본식 건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보통은 ‘마치야’라고 한다. 어떤 이는 한옥에 2층 상가가 있었을까 의문을 갖기도 한다. 김란기 제공

5월이 되니 돈암동 보문동 성북천변 초록이 더욱 짙푸르러졌다. 물소리도 제법 나는 듯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천변을 거닐고 수양버들도 더 늘어지기 시작한다.

 돈암, 보문, 안암동 지역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한옥들이 일시에 들어앉았을까를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혜화문 밖 삼성평을 도시로 편입시키면서 경성부의 확장을 꾀했고, 일제가 애초 계획했던 일본인 거주지로 개발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들이 벌인 전쟁으로 말미암아 물자가 부족해져 결국 민간에 분양했는데 이 땅은 대부분 조선인 ‘청부업자’들에게 돌아갔다.

 필자는 1980년대 논문을 쓰면서 이 지역 한옥들을 누가 지었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부는 확인한 바 있다. 말하자면 이 근대적 한옥을 지은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인 ‘청부업자’(개발사업자)들로 조선총독부에게서 땅을 사들여 한옥 사업을 했다.

 내가 만나서 이야기한 사람은 이 지역에 집을 많이 지은 청부업자 김종량의 아내 조계찬( 1989년 당시 83살)부인과 건축가 장기인(작고)이었다. 김종량은 오래전인 1962년에 돌아가셨고, 부인은 생의 말년을 소적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의 기억은 또렷하여 남편의 ‘청부업’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돈암동에 야산을 샀거든요. 옛날에는 거기가 전차 종점인데, 미아리고개 못 넘어가서 가다가 바른쪽 편에, 그전에 거기 산에서 물이 흘렀는데, 그다음에 물 흐르는 것이 없어졌어요. 거기도 똑같은 집을 많이 지었어요.”

 물론 돈암, 보문 지역의 땅을 넘겨받아 청부사업을 한 사람은 김종량만은 아니다. 김종량은 옛 <한국일보> 자리(중학동 10번지)에 ‘경성목재점’을 열고 청부업을 시작했다. 정세권은 ‘건양사’를 세웠고 마종유는 ‘마공무소’를, 오영섭은 ‘오공무소’를, 김동수는 ‘공영사’를, 이민구는 조선공영주식회사를 가지고 사업을 했다. 또 개인으로는 이윤천, 이승호, 신태종, 이한철 등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이 총독부에게서 땅을 사들여 엄청난 한옥을 지어 조선의 서민들에게 팔았던 것이다.

 그런데 돈암동에는 이런 한옥들만 있는 게 아니다. 성북구청의 첨단 청사를 지나 보문동 방향으로 걷다 보면 대로변에서 한옥으로 된 상가들을 볼 수 있으니, 이것들이 바로 ‘2층 한옥상가’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항상 생활필수품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가게나 점포가 있어야 하고, 그곳들은 너무 멀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이런 큰 주택단지에는 당연히 상점 건물이 들어오는데, 2층은 생활공간이고 아래층이 점포가 된다. 지금은 거의 알아볼 수도 없이 현대식 업종으로 바뀌어 있지만 70여년 전의 이런 상가가 아직도 즐비하다.

 그런데 조계찬 부인은 또 이런 얘기를 했다.

 “돈암동에 큰 집도 있어요. 큰 집인데 굴도리(둥근 도리), 부연(처마 밑 장식)이 있는데 우리가 살다가 누가 샀는가 하면 종근당제약 사장이 샀어요. 사장은 돌아갔고 그 아들이 사장할 거예요. 돈암동에서는 그 집이 제일 크죠.”

 성북천 좌우로 산 아래까지 펼쳐진 한옥의 바다에 자신이 살 집은 좀 더 크게, 더 좋게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 집을 또 찾아가 볼까?

959년의 안암천과 그 일대의 모습. 위쪽 흰 산자락에 보이는 조금 큰 건물은 현재의 동신초등학교이다. 그 오른쪽에 보문사가 있고 천변 좌우에는 빼곡하게 한옥들이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다. 아래쪽 천변에는 초가집 군락도 보인다. (오른쪽)김명신씨의 어린 시절 보문동 집. 대청마루 덧창은 당시 유행하던 젖빛 무늬유리로 그 앞 댓돌 위에 앉은 삼형제가 귀엽다. 임인식, 김명신 제공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골목답사단에서 최근에 만나뵙게 된 사회활동가 김명신(60)씨가 그녀의 친가를 친히 안내한다. 보문동에서 나고 자랐으며 마을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김씨는 그래도 우리 어머니가 더 많이 알고 계시다며 우리를 어머니에게까지 안내했다.

 조계찬 부인이 말한 겹처마에 굴도리와 부연이 정갈하게 남아 있다. 아직 이 집을 지키고 계신 친정어머니는 혹시 이 집이 종근당 사장 집이었는지 말씀을 해 주실까? 그렇다면 김종량과 그의 부인이 살던 ‘돈암동 집’일 텐데….!(계속)

글 김란기 ‘살맛나는 골목세상’ 탐사단 운영

문화유산연대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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