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44세 복서 최용수 "복귀전 끝나고도 갈비뼈 부러진 줄 몰라"

손우성 기자 2016. 5. 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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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가 지난달 26일 그가 운영하는 경기 시흥시의 체육관 링에 올라 포즈를 취했다. 최용수는 나카노 가즈야와의 복귀전에서 갈비뼈가 부러져 몸을 만들지 못했다며 옷을 벗지 않았다. 곽성호 기자 tray92@

44세에 복귀 ‘영원한 복서’ 최용수

한국 복싱의 전설이 컴백했다. 올해 44세인 최용수가 지난 4월 16일 충남 당진 호서고 체육관에서 열린 한국권투연맹(KBF) 전국신인왕전 4강전 메인 이벤트에서 일본의 나카노 가즈야(30)를 8라운드 1분 35초 만에 TKO로 꺾고 복귀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종격투기로 외도한 적은 있지만, 복싱을 다시 한 건 13년 만이다. 최용수를 지난달 26일 그가 운영하는 경기 시흥시의 체육관에서 만났다. 가장 먼저 복귀한 이유를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최용수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열심히 운동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떠올리면서 더 늦기 전에 다시 링으로 돌아가 후회 없을 만큼 야무지게 운동해 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용수는 1995년 세계복싱협회(WBA) 슈퍼페더급 챔피언에 올랐고, 1998년까지 7차 방어에 성공하면서 한국 복싱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런데도 미련이 남았다는 뜻이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자 최용수는 “모든 사람은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하고,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라는 자책을 하지 않느냐”며 “내가 더 열심히 했더라면 항상 최고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챔피언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복귀전에서 오른쪽 갈비뼈가 부러졌다. 영광의 상처. 최용수는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갈비뼈가 부러진 줄을 몰랐다”며 웃음을 지었지만, 인터뷰하면서 통증 탓인지 자주 미간을 찌푸렸다. 최용수는 1993년 한국 주니어라이트급 타이틀 매치 당시에도 갈비뼈에 금이 간 상태에서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 최용수의 ‘투혼’은 예나 지금이나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최용수의 복귀는 이번이 두 번째다. 1995년 10월 아르헨티나의 빅토르 우고 파스를 누르고 WBA 슈퍼페더급 챔피언이 됐다. 1998년 9월 8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하타케야마 다카노리와 12라운드 접전을 펼쳤지만 판정으로 패하면서 1999년 ‘1차 은퇴’를 선언했다. 2년 뒤인 2001년 챔피언 벨트를 되찾겠다며 컴백했지만, 2003년 1월 세계복싱평의회(WBC) 슈퍼페더급 타이틀 매치에서 챔피언이었던 시리몽콜 심마니식(태국)에게 판정패하고 다시 링을 떠났다.

최용수는 1차 은퇴를 떠올리면서 “아쉬웠다”고 표현했다. 그는 “하타케야마의 도전을 받아들일 때 내가 패하면 리턴매치를 한다는 계약 조건이 있었는데, 하타케야마가 리턴매치를 하기 전 다른 선수에게 패하면서 일이 틀어져 버렸다”며 “세계타이틀을 차지할 기회가 사라졌기에 복서 생활을 이어간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글러브를 벗었다”고 설명했다.

2001년 돌아왔지만 벅찼다. 당시 일본에 스카우트돼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다. 최용수는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스트레스가 매우 컸다”며 “의무적으로 계약에 따라 경기를 펼쳐야 한다는 점도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그는 “이번 복귀는 나 자신을 위한 선물이기에 즐겁다”면서 “예전에는 코치가 시키는 대로 훈련해 지겹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은 내가 좋아서 훈련하기에 힘든 것도 못 느낀다”고 말했다.

최용수는 이번 복귀전을 준비하며 복싱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단순히 ‘좋아서’ 복싱을 시작했던 10대 시절을 돌아봤다. 17세 때 처음으로 글러브를 낀 최용수는 1989년 고향인 충남 당진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 1년 뒤 꿈에 그리던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최용수는 “대단한 선수가 되겠다는 등의 목표를 세우고 복싱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며 “누가 복싱을 해보라고 권유한 것도 아니었고, 순전히 재미있어 보여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밝혔다. 복싱은 그의 전부가 됐다. 그는 “복싱을 시작하기 전엔 노는 것밖에 모르는 철없는 학생이었다”며 “우연하게 들어선 복싱의 길에서 자질을 발견했고, 이제는 복싱 없이는 살 수 없게 돼버렸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데뷔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훈련하던 체육관의 관장이 테스트해보라길래 선뜻 링에 올랐다. 그리고 승리의 짜릿함을 난생처음 맛봤다. 성취감이 밀려들었다. 최용수는 “1990년 11월 4일이었다”면서 “다니던 체육관 선배의 종합 타이틀 대회의 이벤트 경기에서 3-0 판정승으로 이겼다”고 말했다.

1972년생. 선수 생명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복서에겐 환갑, 아니 고희를 넘긴 나이다. 게다가 복싱은 격렬하게 전개되는 투기 종목이다. 펀치를 날릴 때도, 펀치를 피할 때도 순발력이 필요하고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한다. 여러 명이 함께 경기를 치르는 단체 구기 종목에 비해 체력적인 부담이 크고, 또 외로운 스포츠다. 구기 스포츠에선 40대가 이젠 흔하지만 복싱, 유도, 레슬링에선 40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의 복귀는 ‘무한도전’에 비유할 수 있다.

최용수는 “처음 복귀를 생각했을 때 물론 나이가 마음에 걸렸지만, 13년이라는 공백이 더 큰 문제였다”며 “그래서 조건부로 훈련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가 스스로에게 내건 조건은 일단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훈련하면서 출전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링 위에 올랐지만 움직임이나 펀치력은 확실히 예전 같지 않았다. 상대가 결정되고 경기를 하기까지 2개월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허리와 어깨가 쑤셨다. 스파링에서 파트너를 가격했는데 주먹이 아팠다. 하지만 즐거웠다. 좋아하던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식사도 조절하면서 착실하게 컴백을 준비했다.

철저한 준비 덕분에 복귀전은 완벽했다. 최용수는 무려 14세 아래인 나카노의 펀치에 얻어맞아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하지만 특유의 투혼을 앞세워 나카노를 밀어붙여 두 차례 다운시켰으며, 8라운드에 TKO로 제압했다. 전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 유명우 해설위원은 “드라마 같은 승부였다. 감동받았다”며 극찬했고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전성기와 다름없는 최용수의 경기력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34전 29승(19KO) 1무 4패였던 그는 이번 승리로 1승을 추가하며 30승 고지에 올라섰다. 최용수는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며 “결국 승부에서 이겨야 인정받을 수 있고 그것이 프로의 섭리”라고 덧붙였다.

스포츠는 상대성이 강하다. 둘이 사각의 링에서 겨루는 복싱은 더욱 그렇다. 상대의 장단점을 훤히 꿰고 있으면 이길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그래서 스포츠에선 ‘정보전’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최용수는 복귀전 상대인 나카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아니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다. 최용수는 “나카노가 왼손잡이라는 것 외엔 그에 관한 정보가 없었고 그 흔한 경기 동영상조차 구하지 못했다”며 “나카노가 그렇게 강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너무 겸손한 것 아니냐고 묻자 최용수는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자만”이라며 “13년이 지났기 때문에 몸 상태가 현역 시절의 30% 정도밖에 안 되는 느낌이었지만, 상대가 왼손을 쓰는 선수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효율적으로 몸을 만들고 대비했다”고 설명했다.

최용수는 ‘외도’한 적이 있다. 2006년 이종격투기 K-1에 데뷔했다. 1차 은퇴 뒤 2003년 다시 글러브를 벗었던 그에겐 일종의 ‘일탈’이었다. 최용수는 “당시엔 권투계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며 “그래서 K-1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말한 뒤 “더 이상 K-1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면서 화제를 돌렸다.

복싱의 인기는 사그라졌다. 과거엔 가장 큰 인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뒷전으로 밀렸다. 뚜렷한 스타도 없고 경기력도 뚝 떨어졌다. 복싱을 스포츠가 아닌 다이어트로 여기기도 한다. 그의 컴백이 돋보이는 이유. 최용수는 그러나 “나 혼자 침체된 복싱을 부흥시키고 인기를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식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최용수는 “복싱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최용수가 복싱 발전에 보탬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44세에 복귀했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운동하기 위해 다시 링에 올랐다. 물론 구체적인 목표는 따로 있다. 최용수는 “세계타이틀을 획득하고 싶다”며 “나이는 중요하지 않고, 앞으로 2∼3경기 정도 더 치른 후에 세계타이틀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만약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정말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다는 뜻도 내비쳤다. 은퇴식은 화려했으면 좋겠단다. 그는 “다른 종목을 보면 은퇴하는 선수가 팬들과 함께 어울려 기억에 남는 마무리를 하는데, 복싱은 지금까지 그런 게 없었다”면서 “팬들과 마지막을 장식하면 미디어의 주목을 끌 수 있고, 그것이 복싱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용수는 세계타이틀을 다시 강조했다. 그는 “진짜 은퇴에 앞서 세계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쏟아붓겠다”고 다짐했다.

최용수의 복귀는 40, 50대 중년들에게 희망을 안겼다. 최용수는 “많은 중년 분들께서 나를 보고 용기와 힘을 얻으셨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드린다. 더 열심히 훈련해 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우성 기자 applepi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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