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화폐..'문상'을 아십니까?
혹시 '문상'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아이들은 알고 어른들은 모르는 이 단어.
바로 문화상품권의 줄임말입니다. 한해 6,000억 원이 넘는 '문상', 즉 문화상품권이 유통되는데 사실상 청소년들의 화폐처럼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문상은 문화 진흥이라는 본래 취지에 걸맞게 쓰이고 있을까요? 청소년들의 화폐, 문상의 실체를 추적해봤습니다.
문화상품권은 성매매 화폐?
어둡고 허름한 경기도 외곽의 한 모텔.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이 가출 청소년 이 모 양의 초라한 보금자리입니다.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번 돈으로 이런 모텔방을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 한지도 벌써 3년. 이 양은 "그냥 매일 모텔에서 잤다. 노래방 도우미 일로 번 일당은 주로 모텔비로 썼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온 뒤 쏟아지는 건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어른들의 갖가지 성매매 제안이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으로 벗은 몸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거나, 음란 화상 채팅을 하면 돈을 주겠다는 성인들의 제안이 이런 청소년들을 유혹합니다. 이 양은 이른바 '몸캠' 제안에 대해 털어놨습니다. "사진으로 신체 부위에 따라 액수를 달리해 정육점에서 고기 팔 듯이 한 적도 있고, 영상통화를 걸어 보여준 것도 있다"며 어른들의 '나쁜 제안'을 설명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청소년들의 성을 사는 부도덕한 어른들, 그들이 지불하는 주된 수단이 바로 '문상', 문화상품권입니다.
씻기 힘든 상처…‘문상 벌이’
어떤 여중생은 문화상품권을 받고 인터넷으로 자신의 음란사진과 영상을 보내는 '문상 벌이'를 했다가 사진과 영상이 유포됐습니다.
이 여중생과 10여 명의 성인 남성들이 함께 채팅했던 이른바 '노예 대화방'에서는 ‘음란행위 한 번에 문상 몇 장'이라는 식의 대화가 계속해서 오고 갔습니다.
결국 학생의 부모님이 전문 업체에 디지털 기록 삭제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여학생이 받은 상처까지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기록 삭제를 도운 디지털 기록 삭제 업체 김호진 대표는 부모가 딸의 비행을 알게 된 상황에 대해 "(부모가) 아이 방을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아빠의 허리띠나 개목걸이가 있었다. 이상해서 아이가 자는 사이에 휴대전화를 찾아서 뒤져 본 거다. 그래서 알게 됐다고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김 대표는 "온라인상에서 '문상 필요한 사람' 이렇게 쪽지를 보내면,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참여를 한다"며 '문상 벌이'의 실태를 귀띔해줬습니다.
돈인 듯 돈 아닌 ‘문상’…범죄에 악용
청소년의 문화를 증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화상품권이 어쩌다 이렇게 전락한 걸까요?
청소년들 사이에서 '문상'은 현금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가출 청소년은 문화상품권의 효용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팔 수 있다. 팔면 돈이 되지 않나. 도저히 안 팔리면 게임머니로 쓰면 된다". 한마디로 쉽게 현금화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장점(?)은 쉬운 현금화에만 있지 않습니다. 거래도 간편합니다. 간단하게 사진 한 장으로도 거래가 가능합니다. 실제로 문화상품권은 거래 흔적이 남지 않는 데다 실제로 만나거나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도 간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문화상품권에는 금액 표시가 있죠. 이 표시를 긁어내면 '핀 번호'가 나옵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문화상품권을 이용할 때는 '핀 번호'를 입력하는 창이 뜨고 여기에 '핀 번호'만 넣으면 결제가 이뤄집니다. 이 핀 번호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거나 문자로 보내면 사실상 상대에게 송금이 완료되는 것입니다. 굳이 현금화하지 않아도 인터넷 거래에서는 곧바로 현금처럼 사용된다는 얘기입니다.
본인 명의의 은행계좌가 없거나 부모의 동의 없이 금융 거래를 하기 어려운 미성년자들에게 문화상품권은 거래가 편리한 '화폐'인 셈입니다.
문제는 그 간편함이 악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온라인 성매매'가 '문상'이라는 결제 수단을 이용해 청소년들에게 검은 손길을 뻗치고 있습니다. 가출 청소년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도 유혹의 대상입니다.
한 고등학생은 SNS를 통해 성매매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학생은 페이스북을 통해‘영상통화를 하면 3일에 15만 원을 주겠다. 문화상품권으로 돈을 대가를 줄 수도 있다'는 쪽지를 받았습니다.
문화상품권, 새로운 범죄 사각지대?
'문상 벌이'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청소년 성교육 전문가와 함께 인터넷을 검색해봤습니다. 음란 사진과 영상을 문상으로 거래한다는 글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이 성을 매매하는 행위가 문화상품권을 통해 아무런 통제 없이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한신 교육문화연구소 임정혁 소장은 "현금 송금을 하면 부모님에게 내역이 나오기 때문에 부모한테 들킬 수도 있다"며 "문화상품권으로 거래하면 즉각적으로 현금으로 바꿀 수도 있고 현금화 시킬 수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 다 '문상 거래'를 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임 소장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미성년자의 성을 문화상품권을 통해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굉장히 무방비 상태"라고 우려했습니다.
문화상품권은 얼마나 발행되고 어디에 사용되고 있을까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관련 업계는 인지세 등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한해에 6,000억 원 이상의 문화상품권이 유통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문화상품권의 발행과 이용 내역이 불투명하고 추적도 어렵다 보니 청소년 성매매 외에 다른 범죄에 이용되기도 합니다. 2015년 10월에는 다른 사람의 스마트폰을 빌리거나 훔쳐 모바일 문화상품권 1,300만 원어치를 구입한 뒤 편의점에 핀 번호를 적어내 현금으로 바꾼 20대가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경기 의정부경찰서 관계자는 "온라인에서는 고유 번호, 문화 상품권의 핀 번호라고 그러는데 그 결제코드만 알고 있으면 그냥 누구라도 결제를 해버릴 수가 있다"며 "핀 번호를 적어서 편의점에서 현금으로 세탁하는 것"이라고 문화상품권의 악용 사례를 설명했습니다.
관련 부처도 발행 업체도 ‘나 몰라라’
문화상품권은 지난 1998년 문화 관련 협회와 단체 27곳이 '한국문화진흥'을 설립한 뒤 정부의 인가를 받아 발행을 시작했습니다. 발행 5년 만인 지난 2004년 누적 판매량이 1억 장을 넘어서는 등 급성장했습니다.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되면서 모든 종류의 상품권 발행이 전면 자유화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상품권법의 폐지는 관리 감독의 공백을 불러왔습니다. 상품권이 얼마나 유통되고, 발행 목적에 맞게 쓰이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회입법조사처 금융공정거래팀 임동주 팀장은 "상품권 관할법이 없다 보니까 상품권을 관할하는 관청도 없고, 정부 부처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규모를 어느 기관에서도 추정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문화상품권은 여러 종이 있지만, 제일 처음 발행을 시작했고, 가장 널리 유통되는 상품권은 '한국문화진흥'의 '컬쳐랜드 문화상품권'입니다.
문화상품권이 인터넷에서 악용되고 있는데 대한 한국문화진흥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업체를 찾았지만 한국문화진흥은 "취재가 어렵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고객서비스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개선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밝혔습니다.
처음 한국문화진흥에 문화상품권 발행을 추천한 '문화체육관광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어떤 역할도 없다.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다"며 "옛날에는 (관리 업무를) 했었는데 지금은 그 업무를 하는데가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유명무실 ‘문화상품권 인증 제도’
하지만 2008년 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에는 문화상품권 인증 제도가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가맹점 가운데 도서, 공연 등 문화예술 분야에 속한 가맹점 수와 여기서 사용한 상환액의 비율이 일정 기준 이상일 경우에만 문화상품권 인증을 주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이를 위해 문체부는 매년 기준을 고시하고 문화상품권 인증 신청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취재결과 문체부가 지난 2008년 이후 이 같은 인증 제도를 운용한 적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된 2008년 이후 한 번도 인증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공백이 생겼다. 그래도 아무런 이슈가 안되니까 업무가 붕 뜬 것"이라며 "우리가 적극적으로 인증한 적이 없으니까, 그 조항이 사실상 사문화 됐던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문체부는 모든 상품권의 발행이 자유기 때문에 문화상품권 역시 반드시 인증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또 인증제는 문화상품권을 통제·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 예술 활성화를 위해 상품권 사용을 촉진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부연했습니다.
하지만 문체부가 인증 업무에 손을 놓은 사이 문화예술 활성화라는 상품권 도입 취지는 변질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현질(게임아이템 구매)','상품권 깡(상품권을 현금으로 바꾸는 것)','게임이나 음란 동영상 결제 수단으로 문화상품권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한 청소년은 “문화상품권으로 책사는 건 바보같은 일이다”고 말했습니다.
부모들, “문화상품권 너마저…!”
대부분 부모는 '문화상품권'이 도서 구입이나 문화 공연 등 건전한 목적에만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돈이나 선물을 문화상품권으로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부모인 박옥자 씨도 "문화상품권 사용처는 잘 모르고 그냥 어디서 책 산다고 하면 그냥 그런 걸로만 알았다. 게임도 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고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실제로 사용되지 않아 한국문화진흥이 가져가는 낙전 수입만 한 해 70억 원이 넘는 문화상품권. 공인회계사 이지훈 씨는 "영업외수익으로 분리되는 상품권 소멸시효경과이익(낙전수입)은 비중이 영업손실에 비해서도 많이 큰 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수익을 올리며 어느새 청소년들의 '화폐'로 자리 잡은 '문화상품권'.
그 중요성에 걸맞은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지 제도적 점검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슬기기자 (wakeup@kbs.co.kr)
최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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