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戰犯재판 70주년.. 日내부 "사과, 할 만큼 했다" 기류 확산

도쿄/김수혜 특파원 2016. 5. 3.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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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엔 반성 시늉하지만 속으론 "전쟁에 진 것일 뿐" 아사히신문 "이중 기준 현상" 극우 정치인 아닌 보통 사람도 "다음 세대까지 사과할 필요야.."

70년 전 오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를 포함한 A급 전범(戰犯) 28명이 일본 도쿄 옛 육군성 강당에 앉았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죄를 심판하는 '도쿄 재판' 첫날이었다.

두 세대 전에 이뤄진 이 재판을 두고 일본 사회에 '역사관의 더블 스탠더드(이중 기준)'가 확산되고 있다고 아사히신문이 2일 보도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반성하는 태도를 유지하지만, 국내에서는 우익을 중심으로 "도쿄 재판은 승자의 보복이었다" "일본의 죄는 전쟁에 진 것뿐"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산케이신문은 지난 30일 영국 기자 헨리 스콧 스톡스(78)의 책 '전범 국가는 미국이었다'를 독자들에게 추천했다. 그는 "전범 처형이야말로 미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패전 이듬해에 열린 도쿄 재판은 공판 첫날부터 소란스러웠다. 전범 중 한 명인 극우 사상가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가 각국 기자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정신적으로 무너졌다. 그는 함께 재판받던 도조의 뒤통수를 때리고, 독일어와 영어로 횡설수설했다. 오카와에게 얻어맞은 도조는 미군에 체포되기 직전 권총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해 미군 병원에서 치료받고 법정에 선 처지였다. 일본 사회는 이런 장면을 폭동도 소요도 없이 조용하게 지켜봤다. 속으론 어땠을까. 미국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국민 전체가 절망으로 멍해진 '교다쓰(虛脫)' 상태였다"고 썼다.

이제는 달라졌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일본이 잘못했다'는 인식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는 점이다. 아사히신문이 2006년 일본인 3000명을 면접조사 했을 땐 응답자 세 명 중 한 명(36%)만 "일본이 충분히 사죄해왔다"고 했다. 반면, 지난해 4월 조사에선 "충분히 사죄했다"는 응답이 57%로 절반을 넘겼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는 20년 전 담화에서 "일본이 많은 나라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줬다"고 했다. 누가 잘못했는지, 왜 사과하는지 명쾌한 문장이다. 반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작년 8월 종전 70년 기념 담화에서 "일본은 지난 전쟁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현해왔다"고 남의 일인 양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 세대가 계속 사과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일본 국민이 이 대목에서 박수 쳤다. 아베 담화 발표 직후 이뤄진 요미우리 신문 여론조사에서 "앞으로도 일본이 사과를 계속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63%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1차 집권 때인 2006년 "A급 전범들은 일본법상으로는 전범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2차 집권 첫해인 2013년에도 "연합국 측이 승자의 판단에 따라 단죄했다"고 했다. 이런 발언이 문제가 되면 "일본은 (도쿄 재판) 판결을 수용했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물러섰다. 다른 우익 정치인들도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였다.

문제는 보통 사람들도 점차 이런 태도가 크게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아사히 신문은 "도쿄 재판에 대해 수용과 반발이 공존하는 상황이 일본 사회에 널리 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도쿄 재판을 뒤엎자는 건 아니지만, 불만은 있다' '아무리 일본이 잘못했다고, 수십년간 사죄할 일인가. 원폭은 너무나 잔혹했다'는 이중적 생각이 대중 사이에 스며들고 있다는 것이다.

1955년 일본 정부 조사에선 일본 국민 19%가 "(전범 처벌은) 당연하다"고 했지만, 작년 4월 아사히신문 조사에선 응답자 5%만 "도쿄 재판은 전쟁 책임자를 재판한 정당한 재판이었다"고 했다.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었다"는 사람(30%)보다 "침략 전쟁과 자위 전쟁의 양면이 있다"는 사람(46%)이 훨씬 많았다.

[도쿄재판은…]

12개국 참여한 국제군사재판, 도조 히데키 등 戰犯분류·심판

정식 이름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이다. 1946년 1월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조례를 만든 뒤, 그에 따라 전범(戰犯)을 추리고 기소하는 과정을 거쳐 1946년 5월 3일부터 1948년 11월 12일까지 2년 반 동안 진행됐다.

전범을 분류하는 A~C급은 범죄 정도가 아니라 범죄 종류를 가리킨다. 전쟁을 계획하고 시작한 죄가 A급, 포로 학대 같은 일반적 전쟁범죄가 B급, 민간인 학살 같은 인도적 범죄가 C급이다.

당시 변호인단은 "도쿄 재판은 승자의 '사후 심판'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일본 우익은 지금도 같은 논리를 편다. 하지만 서구 학자들 중에는 "절차상 하자가 있지만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연합국이 비교적 너그러웠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와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대원수는 당초 전범 즉결 처형을 주장했다.

미국·프랑스·호주 등 12개국 법조인이 재판부를 구성했다. 인도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만 "침략을 정의하기 곤란하다"며 전원 무죄를 주장했다. 호주의 윌리엄 웹 판사와 프랑스의 베르나르 앙리 판사도 소수 의견을 냈지만, 이들은 팔 판사와 달리 "일왕을 심판하지 않았다"는 점을 불만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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