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 중 땅에 대한 안목이 높은 이를 들자면 현대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박정희 정부가 홍수대책으로 소양강 댐 건설계획을 내놓자마자 회사 돈을 총동원해 서울에 홍수가 나면 침수되는 땅을 몽땅 사라고 했다는 지시는 지금도 전설이다. 현대 직원들은 홍수가 나면 어김없이 물에 잠기는 곳을 수소문했고, 헐값에 그곳을 사들였다. 압구정동 신화의 시작이었다. 롯데 신격호 회장도 ‘신의 손’에 속한다. 롯데는 이미 껌이나 과자 재벌이 아닌 부동산 재벌이다. 1970년대 소공동 부지를 사들여 롯데백화점을 지었다. ‘명동 1평이 설악산 10만평보다 낫다’는 당시 신 회장의 얘기는 유명하다. 1980년대에는 잠실에 롯데부지를 대거 사들였다. 이곳은 그동안 땅값만 100배 이상 올랐다. 롯데 계열사들이 보유한 쇼핑센터 부지는 경기불황에도 하나같이 자산가치가 급등한다.
![[박용채 칼럼]부영 이중근 회장의 모노드라마](https://img.khan.co.kr/news/2016/05/02/l_2016050301000244600021721.jpg)
현재 활동 중인 총수 가운데에서는 부영의 이중근 회장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이 회장의 땅 보는 안목은 ‘구름 위’ 경지라고 한다. 매물을 보는 순간 용적률과 건축비 계산은 물론 매년 들어올 이문까지 머릿속에 그려진다고 한다. 부영은 1983년 임대사업으로 시작해 지난 4월 현재 계열사 18개, 자산 20조원으로 재계 순위 21위(공기업 포함)에 오른 그룹이다. 임대사업은 분양사업처럼 한번에 목돈을 쥐기 어렵다. 하지만 5년, 10년 후 분양 전환을 하면 수익을 꾸준히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생긴 자금으로는 다시 땅을 산다. 경기가 좋지 않은 요즘은 기업이나 금융권에서 앞다퉈 매물을 쏟아내 먹거리가 지천에 널려있다. 실제 이 회장은 최근 몇 개월 새 인천 송도 옛 대우자판 부지를 비롯해 태백 오투리조트, 서울 세종대로의 삼성생명 본관 등 1조원어치를 사들였다.
필자는 이 회장과 만난 적은 없다. 국내외 기관에 교육시설을 지어주는 등 봉사활동을 하고,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자는 취지로 ‘6·25전쟁 1129일’ ‘광복 1775일’ 같은 근대사 기록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는 정도를 아는 게 고작이다. 가난을 딛고 노력과 열정으로 성공한 기업인들의 사회적 기여를 비딱하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것은 과거 자수성가형 총수들이 범했던 일인극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부영은 최근 국세청 세무조사에 이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부인 등 친·인척 명의의 회사를 통해 세금을 포탈한 혐의다. 2004년 비자금 조성 혐의로 이 회장이 구속된 데 이어 최대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영의 기업 문화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설명된다. 하면 된다는 상명하복식 군대문화에 주말에도 출근하며 휴일 없이 일한다. 경영진은 몇 달을 못 버티고 수시로 교체된다. 그만큼 총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지배구조는 또 어떤가. 계열사 중 상장기업은 하나도 없다. 반면 지분율은 높다. 이 회장 혼자 그룹 전체지분의 40.1%를 갖고 있다. 감사나 사외이사의 역할은 미미하다. 계열사끼리의 자금거래는 다반사다. 직원 10명 미만인 계열사가 6곳이나 되며 대부분 부영과의 거래에 의존하고 있다. 사달이 자주 날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부영의 이 같은 경영행태와 문화는 한국적 오너 기업의 전형이다. 신속·과감한 결단, 독단과 독선 같은 오너 경영의 장점과 폐단이 같은 길을 가면 부작용만 더 커진다. 외환위기 때 대우나 한보가 몰락한 것도 독단 경영의 폐해다. 지금 문제를 겪고 있는 현대상선이나 한진해운도 같은 길을 걷다 몰락 중이다. 경영진의 무능 탓에 수많은 직원들이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다. 문제를 피하는 방법은 많다. 당장이라도 시스템을 보완해 권한과 책임을 나누는 것이 옳다. 승계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평생 기업을 일군 이에게 후계를 얘기하는 것은 껄끄럽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이 회장은 75세로, 3남1녀를 두고 있다. 재벌의 모든 분쟁은 승계과정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그간의 경험에서 확인된 사안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외국 유학을 다녀온 2세들이 초고속 승진 끝에 경영을 맡아 기업을 위기에 빠트린 것은 익숙한 풍경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한국 샐러리맨의 우상이 된 것은 열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몸을 낮추며 구성원들과 소통할 줄 아는 인간적 매력 덕분이다. 정 회장 스스로도 ‘남보다 돈을 조금 더 가진 노동자’라고 말해왔다. 불황이 익숙해지고, 구조조정이 대로를 활보하는 시대다. 이 회장은 현재 30대 재벌 중 유일한 자수성가형 총수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부영은 물론 한국기업의 앞날을 가늠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결정은 이 회장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