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보호소년 함께 걸은 '티격태격 9일'

2016. 5. 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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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치유의 ‘2인3각 도보여행’

부산가정법원 멘토링 프로그램
정영태 판사 9번째 주자로 참여

제주 도착부터 교통카드 탓 허둥
“서운하다” “힘들다” 투덜대다가도
하루 6시간 걸으며 마음 속 얘기
함께 길 잃고 길 찾는 소통여행

길수(가명·뒤쪽 검은색 옷)가 정영태 부산가정법원 판사와 제주 올레길을 걷는 도중 돌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있다. 정영태 판사 제공

지난 4월18일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용눈이오름’(해발 247.8m). 부산에서 온 두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말없이 오름 능선을 걸었다. 한 번씩 앞선 사람이 뒷사람이 잘 따라오는지 힐끗힐끗 쳐다봤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30년 된 부부가 여행 도중 다투고 섭섭한 마음에 말없이 걷는 모습과 닮았다.

앞서 걷는 사람은 40대 현직 판사고 뒤따라가는 사람은 한순간의 일탈행위로 법원의 보호처분을 받고 있는 ‘위기의 고교 1학년’이다. 부자지간도 아닌 두 사람을 제주 여행의 동반자로 묶은 것은 ‘2인3각 도보여행’ 프로그램이다.

2인3각 도보여행은 두 사람이 각자의 다리 중 한쪽을 끈으로 묶고 함께 달려가는 2인3각 경기처럼, 멘토인 성인과 멘티인 일탈 또는 학업중단위기, 학교폭력 피해자 등의 청소년이 8박9일 일정으로 도보여행을 다녀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가 제안했다. 프랑스에서도 ‘쇠유’란 단체가 비행청소년들을 프랑스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낯선 어른과 함께 석 달 동안 2000㎞를 걷게 한 뒤, 여행을 마치면 처벌 대신 귀가조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부산의 사단법인 ‘만사소년’이 2인3각 도보여행을 주관하고 기업체와 독지가 등이 경비를 후원한다. 일정을 8박9일로 정한 이유는 고비를 만날 때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는 훈련을 하는 데에 있다. 일정이 너무 짧으면 단순 관광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2인3각 도보여행에서 가장 힘든 점은 멘토 구하기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직장인들이 8박9일 일정을 소화하기는 힘들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짝을 이뤄 8박9일 도보여행을 다녀온 1기 여덟 팀의 멘토는 전업주부와 방학을 맞은 교사, 대학생 등이었다.

2기 첫 주자는 정영태(45) 부산가정법원 판사와 부산가정법원의 보호소년 김길수(가명·16·고1)군이었다. 정 판사는 천 부장판사가 “멘토 구하기가 힘들다. 멘토가 돼 달라”고 하자 즉석에서 멘토가 됐다. 10년 이상 근무한 판사들 가운데 여섯 달 동안 출근하지 않고 미리 정한 연구주제와 관련해 논문을 써내는 연구법관이어서 가능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 것인지가 걱정이 돼서 잠을 설쳤습니다.”

정 판사는 총선 사전투표를 하고 지난 11일 오후 4시께 부산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길수와 함께 제주로 향했다. 제주도에 도착하면서부터 좌충우돌이었다. 버스를 탔는데 지급받은 교통카드에 금액이 충전돼 있지 않았다. 버스기사의 배려로 호주머니에 있던 1000원만 냈지만 시작부터 어긋나 정 판사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길수한테 맛있는 돈가스를 사주기 위해 미리 알아봐둔 식당으로 갔으나 공사 중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셋째 날엔 올레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다. 아침 8시30분부터 제주시 한경면 금등리에서 수월봉을 목표로 걷기 시작했는데 휴대전화 앱이 말썽을 부려 당산봉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길수가 “살면서 오늘이 제일 힘들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2시간가량 헤매고 오후 1시께 식당에 도착했다. 정 판사가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하자 길수가 “우린 2인3각이잖아요”라며 씩 웃었다.

“길수가 애벌레를 무서워했어요. 일탈 청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길 위에서 길수는 영락없는 10대였다.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채소는 입에 대지 않았고 해변에서 죽은 새를 보자 묻어주기도 했다. 길수는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어갔다. 올레길과 해변을 걸으면서 길수는 좋아하는 축구와 여자친구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은 올레길을 걷는 동안 여행자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갈등도 겪었다. 길수는 하루 평균 15~20㎞씩 걷는 것이 힘들어 투덜거렸다. 길수는 걷는 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해 금단 증세로 힘들어했다. 정 판사는 길수가 자신이 사준 모자를 쓰지 않고 여행 도중 산 모자를 쓴 것이 서운했다. 2인3각 프로그램을 후원하는 자원봉사자가 길수가 좋아하는 회를 사줬는데 잘 먹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정 판사는 속이 상했다. 둘의 갈등은 여행 6~8일차에 최고조로 올랐다. 거센 빗줄기와 강풍을 맞으며 강행군을 한 탓에 몸과 마음이 더 힘들었다. 둘은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 등에서는 30여m 떨어진 채로 말없이 걷기만 했다.

갈등 뒤에 하나가 되는 여행의 법칙은 틀리지 않았다. 여행 막바지에 길수는 여행 첫날 정 판사한테 받았으나 쓰지 않던 손수건을 보여주며 “잘 쓸게요”라며 젤리를 줬다. 순간 정 판사의 마음도 풀렸다. 둘은 우도에서 낄낄대며 사진을 찍고 제주시로 돌아가는 버스와 숙소인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길수는 “나도 돈을 많이 벌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말했다.

“소년 사건의 70%는 부모한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길수한테 즐거운 추억을 주고 싶었어요. 길수가 앞으로 살면서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이번 여행을 떠올리며 잘 이겨냈으면 합니다.”

둘은 지난 19일 8박9일의 일정을 마치고 부산에 도착했다. 이날 길수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면서 한 후원자가 여행을 떠날 때 준 용돈으로 산 볼펜을 정 판사한테 건넸다. 길수는 청소년 보호기관인 쉼터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정 판사는 페이스북에 가입했다. 둘은 페이스북 친구가 됐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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