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형제가 어떻게 죽는지 지켜봤잖아요

입력 2016. 4. 30. 11:56 수정 2016. 5. 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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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성호 누나’ 박보나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들을 위해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 주택가에 마련된 공간 ‘우리함께’에서 지난 19일 만난 박보나씨. 보나씨는 안산의 사회복지사들이 마련해준 이곳이 “가장 마음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라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작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바닥에 무지갯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앉은뱅이 낮은 탁자 위에 초 네 자루. 작은 묵주가 걸린 나무십자가 한 개와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누이는 조심스레 바닥을 정리하고 반듯하게 방석을 깔았다. 살아 있었으면 올해 신학교에 입학했을 동생을 만나고 싶을 때 그는 이곳에 온다.

동생 성호는 사제가 되고 싶어 했다. 소년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서 인근 지역과 전주, 진천, 제주에서 온 목수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뙤약볕 아래서 3주 동안 성당을 지었다. 안산합동분향소 주차장 한편에 마련된 작은 목조성당 앞에는 ‘기다림의 성당’이란 팻말이 붙었다. 성호의 성당에서 누이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동생이 왜 죽었는지, 왜 구조되지 못했는지, 아무 응답도 받지 못했는데 “이제 그만 잊으라”는 폭력 앞에서 누이는 치욕을 견디며 기다림을 계속한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지 들어야 했다. 부질없는 세월 속에서 자꾸만 느슨해져가는 기억의 끈을 조이고 기다림의 간절함을 상기하는 것만이, 그에게 힘을 보태주는 작은 방편이 되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 2주기로부터 사흘이 지난 4월19일 오후, 안산 기다림의 성당에서 박보나(22)씨를 만났다.

안산합동분향소 주차장 한편에 마련된 ‘기다림의 성당’ 안에 앉은 보나씨의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젠 괜찮냐?’고 묻지 마세요

-어디가 편하겠어요?

“여기 유가족 휴게실에서 해도 되고요….”

-제일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을 말씀하세요.

“그러면…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들이 같이 쓰는 공간이 있어요. 여기서 가까워요.”

분향소에서 차로 10분쯤 떨어진 안산시 고잔동의 주택가, 단원고등학교 인근의 연립주택으로 그가 우릴 안내했다. 일반 가정집과 별다를 것 없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분홍색 벽지와 원목 선반,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진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안산지역 복지관의 사회복지사들이 뜻을 모아 “마음 놓고 울 곳도 없는”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들을 위해 만든 ‘우리함께’란 공간이다.

-화사하고 아늑하네요.

“저희가 처음부터 벽지 색깔도 정하고 소품도 골라서 공간을 같이 만들었어요. 여기선 일방적으로 프로그램을 강요하지 않아서 좋아요. 그동안 형제자매를 위한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이 있었는데 저희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그분들이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제안하시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이 옆에 작은 방이 ‘우는 방’인데 막상 여기 와서 다른 형제자매들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굳이 그 방에 혼자 가서 울 필요를 못 느껴요. 제일 마음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에요.”

주섬주섬 준비해 온 자료를 탁자 위에 늘어놓고 녹음기를 켜서 그 앞에 내놓으면서도 나는 쉽게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솔직히, 세월호 가족분들 인터뷰하는 거 전 좀 힘들어요. 무심코 던지는 말이 또 다른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그동안 기자들이 묻는 말 중에서 제일 상처가 된 말은 뭐예요? 알려주시면 조심할게요.

“(잠시 망설이다가) ‘이젠 괜찮죠?’라고 물어보는 거… 사건 나고 한 달밖에 안 지났을 때도 그렇게 물어보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또?

“기자님들한테는 대부분 상처를 받았던 것 같아요. 가끔 안 그런 분도 계시지만. 얘기를 부풀려 하시거나 왜곡하신 경우도 많고.”

-얘기를 부풀려 한다는 게 뭐죠?

“좀더 자극적으로, 좀더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게, 그렇게 각색을 하시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런 일 때문에 어린 동생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고통을 외면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을 선정적으로 각색하는 것도 위선이다. 그들이 얼마나 불행한지 신파적으로 보여주는 건, 그들을 값싼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만든다. 박보나는 ‘고통을 하소연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이 끔찍한 불행을 목도한 ‘목격자’로 우리 사회의 적폐에 대해서 ‘증언’하고 싶은 것이다.

사제 꿈꾼 동생 생각날 때면
‘기다림의 성당’ 찾는 누나
고통 하소연하는 피해자 아닌
불행 목도한 목격자로서
한국 사회의 ‘적폐’ 증언

참사 한 달 뒤부터 가족협의회
유가족 비방글 모니터링 맡아
일반 시민의 글은 처벌되고
정작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증거불충분이나 불기소 처분

안산합동분향소 주차장에서 ‘기다림의 성당’을 배경으로 선 박보나씨. 보나씨는 인터뷰에서 “(2년 뒤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면) 그때도 내가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고 진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민 갈 수 없는 이유

-사고 한 달 뒤인 5월말부터 가족대책위원회에 합류해서 희생자나 유가족에 대한 비방글을 모니터링하는 일을 맡으셨죠? 누나 입장에서 그런 글을 뒤져본다는 게 엄두가 안 날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됐지요?

“아빠 핸드폰으론 카톡이 안 돼서 제가 아빠 대신 (유가족) 카톡방에 들어가 있었어요. 제가 페이스북에서 어떤 비방글을 보고 ‘고소해야 하지 않냐?’고 카톡에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걸 계기로 가족대책위에서 언론모니터링 팀을 만들기로 했지요. 근데 부모님들이 그런 일을 능숙하게 하기 어려우시니까 저더러 도와줄 수 있겠냐고 하셔서 시작하게 됐어요.”

-터무니없는 글들이 많았을 텐데….

“가족의 입장에선 수위가 높은 욕이든 낮은 욕이든 다 비슷하게 들려요. ‘세월호는 교통사고인데 왜 그러냐?’ ‘그만 좀 해라’ ‘아이들이 멍청해서 하늘나라로 간 거다’ 이런 식의 얘기들은, 표현수위가 높지 않아도 힘들긴 마찬가지죠.”

-경찰은 뭐 하고, 그런 일을 왜 유가족이 직접 했어요?

“초반에는 사이버수사팀에서도 자체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는데 실제로 큰 도움은 되지 못했어요. 사실 우리 모니터링 팀에도 사람이 더 필요했는데, 차마 부모님한테나 동생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비방글을 읽는 게) 너무 힘든 일이라서… 8~9월쯤부터는 4·16연대에 따로 모니터링 팀이 만들어져서 거기서 하게 되었죠.”

-고소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았나요?

“70건을 고소했는데 20건은 취하했고 나머지 50건은 대부분 처벌이 됐어요.”

-그 사람들은 신원확인이 되었어요? 어떤 사람들이던가요?

“40~50대 이상 장년층이 많았고요, 의사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10대 어린 학생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모르겠어요. ‘일베’ 같은 덴 첨부터 그런 사람들이려니 해서 별로 안 찾아봤어요. 일베에 보면 자기 할아버지 죽었다고 인증샷 올리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런 사이트에 세월호 얘기가 뜸해지면 ‘요즘 왜 세월호 얘기 안 나오냐? 욕하고 싶은데’ 하는 글들이 떠요. 그냥 욕할 대상이 필요한 거예요. 근데 정작 이런 비방글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사건 나고 일주일밖에 안 됐을 때 지만원씨가 ‘유가족이 시체장사 한다’ 이런 얘길 했거든요. 그 이후로 유가족에 대한 비난이 많아졌어요. 유명 목사들도 망언을 했잖아요. ‘하나님이 세월호를 침몰시킨 건 기회다’ ‘가난한 애들이 불국사나 가지 제주도엔 왜 가냐?’ 시민의 글은 처벌이 되고, 정작 대중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증거불충분이나 불기소처분으로 하나도 처벌받지 않았어요.”

-그런 모습 보면 이민 가고 싶단 생각 안 들던가요? 세월호 나고 ‘이 나라 못살겠다. 이민 가야겠다’ 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민 가고 싶었죠. 남은 동생들이라도 지키고 싶으니까. 근데 그럴 수가 없어요.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대로 멈추면 더 큰 참사가 일어날 거라고 이때껏 싸웠는데, 이 나라를 바꾸기 전까진, 성호를 여기 두고 이 나라를 뜰 수가 없어요. ‘이민 가면 안 되겠다. 안산도 벗어나면 안 되겠다’ 생각해요. 성호나 제 후배들, 선생님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 순 없어요.”

박재동 화백이 그린 성호군 얼굴.

동생이 떠난 뒤 동생에게 온 편지

박보나는 4남매 중 맏딸이고 성호는 셋째다. 논술교사로 맞벌이를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보나는 성호와 막내를 씻기고 보살폈다. 성호는 유달리 순하고 여려서 4남매 중에 제일 다툼이 없는 동생이었다. 보나도, 밑의 여동생도, 성호도 모두 단원고를 다녔다. 보나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뒤,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면 성호가 마중을 나와 누나를 에스코트했다.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시켜 키운 남동생이라 아이로 여겼는데, 178㎝로 훤칠하게 자란 성호가 밤길에 동행해줄 때는 말없고 듬직한 동생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사건이 나던 날, 보나는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사고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보나는 성호가 어떻게든 살아있을 거라 믿었다. 어려서부터 오토바이에 치이거나 차에 깔리는 큰 사고를 당하면서도 기적적으로 무사해서, ‘주님이 보살펴주시는 아이’라고 불리던 동생이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갈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성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란 생각을 처음 한 건 언제예요?

“그다음주 월요일이든가, 동생들이랑 부모님 옷가지를 챙겨서 진도에 내려갔어요. ‘성호 돌아올 거 생각해서, 성호 방도 치우고 이불도 깨끗이 빨아놨다’고 하니까, 엄마가 ‘그걸 왜 빨았니?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았을걸’ 하셔서 무척 놀랐어요. 3일 지나면서부터 부모님들은 많이 체념을 하셨대요.”

성호는 23일 올라왔다. 어머니는 묵주 팔찌를 찬 아이를 꼭 찾아달라고 부탁했다는데, 성호 팔에 묵주는 없었다. 성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두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을 거라고 보나는 생각한다.

-성호가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건 언제부터예요?

“성호가 고1 때 장래희망을 ‘신부’라고 써서 냈다고 해서 저도 많이 놀랐어요. 중3 때까지도 사회복지사를 할까, 역사 선생님을 할까, 사제를 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사회복지사, 역사교사, 사제…. 성향 자체가 사회의식이 높고 정의감이 강한 편이었나 봐요.

“예. 천성이 평화롭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어요. 우리 가족이 어려서부터 성당을 다녔지만, 성호는 유달리 남들 챙기고 봉사하는 걸 좋아했고 사회의식도 강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엄마 몰래 광우병 촛불집회에 갔다 온 적 있었어요. 다녀와서 엄마한테 얘길 했더니 엄마가 ‘거긴 왜 갔냐?’고 하셨죠. 걱정돼서 하신 말씀이었는데, 성호가 그 얘길 듣고는 ‘엄마도 이건 잘못됐다고 얘기했으면서 왜 가만히 계시냐?’고 따져 물었어요.”

성호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예비신학생 피정에 참여하면서 신부가 될 생각을 굳혔다고 했다. 수학여행을 석 달 앞둔 2014년 1월, 성호는 성당에서 신학 공부를 하다가 ‘2년 뒤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2년 만인 올 1월, 집으로 배달되었다.

인터뷰를 위해 ‘기다림의 성당’ 안에 마주하고 선 보나씨와 이진순(오른쪽)씨. 강재훈 선임기자
보나씨가 인터뷰 도중 꺼내 든 수첩과 노트에 일정과 메모가 빼곡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2년 뒤에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신학교에 지원해 이제 막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재수를 준비중이거나 편입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노력한 모습에 좌절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부모님, 가족,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2년 뒤에 있을 박성호에게 2년 전에 있는 박성호가(2014년 1월 편지 중에서)

-성호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자’고 했어요. 보나씨는 어때요? 하느님이 원망스럽지 않아요?

“이 편지 읽을 때 성호가 우리한테 하는 말인가 싶었어요. 사실 하느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성호를 데려가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갔으면, 주님이 (이런 세상을) 바꿔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근데 시간이 지나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그래서 원망이 더 생겼죠. 하긴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박보나의 큰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마음을 다잡는 동안, 나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성호 데려갔는데 세상 그대로
하느님 원망하는 마음 있었다
“돈이 없어 배 탄 것 아냐
MB 때부터 교육부 배 이용 권유”
희생자 모욕 18명 중 11명 당선

참사 겪고 성공의 의미에 회의
성호 꿈처럼 남 도우며 살고파
직장 그만둔 부모 몸까지 아파
집안 책임져야 하는 현실 고민
“교통사고가 아니라 학살”

단원고 아이들이 배를 탄 이유

박보나를 만든 시간들

-안산이나 단원고에 대해 심어진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어요. 못사는 동네, 못 배운 부모, 가난한 아이들….

“초반에 워낙 그런 기사들이 많았잖아요. ‘메이커 신발도 못 사줬는데…’ 하는 감성적인 기사들. 안산이 썩 잘사는 동네는 아니지만, 그렇게 못사는 것도 아니에요. 저랑 여동생 모두 단원고 졸업생인데 그 사건 이후 단원고 출신이라고 하면 시선이 달라져요. 언론에서 그렇게 비췄으니까.”

-돈 없다고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돈 없어 불쌍한 사람으로 모는 것도 몹시 불쾌한 일이겠어요.

“네. 돈 없어서 배 타고 갔다고 그러잖아요. 돈 없는데 왜 수학여행은 가냐 이런 얘기까지 나오고. 그게 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죠.”

-돈 때문에 배 타고 간 게 아니라고요?

“아니에요. 이명박 정부 때부터 교육부에서 공문을 보내서 각 학교들에 (배를 이용하라고) 권유를 했다고 알고 있어요. 제가 단원고 다닐 때도 비행기를 타고 갔었는데 제 바로 밑의 학년부터, (제주) 갈 때는 배를 타고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타는 걸로 바뀐 거예요. 다른 학교들도 비슷해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교육부 권유로 그랬다고요.”

-교육부에서 왜 권유를 해요? 해운업체 장사시키려고?

“사실 이 사건의 근저에는 박근혜 정부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나 엄마나, 다른 학부모들도 배는 위험하지 않겠냐고 걱정이 많았고 애들도 왜 힘들게 배를 타냐고, 비행기 타자는 의견이 더 많았어요. 그래도 배 타고 가면 불꽃놀이 하니까 그건 추억이 될 거다 해서 그냥 간 거죠.”

-어린 나이에 형제자매를 잃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큰 아픔일 거예요. 질병으로든 일반사고로든 교통사고로든…. 세월호 참사로 형제자매를 잃는다는 건, 그런 경우와 다른가요?

“다르죠. 저희는 형제들이 죽어가는 순간을 다 봤잖아요. 형제가,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고, 죽어서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봤고, 책임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 다 봤잖아요. 이 사건 후에 어른들이 변하겠다고 했는데, 사건 책임자도 사건을 담당하는 이도 모두 어른이었어요. 해경, 정치인, 판사, 검사, 선장, 선원, 대통령… 모두 어른인데 그 어른들이 바뀌기는커녕 계속해서 가해를 주고, 미안하다고 한 어른들도 하나도 반성하지 않고요.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가족한테 ‘자식 팔아서 시체놀이한다’고 욕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데 법정도 언론도 모두 등을 돌려요. 심지어 친인척이나 친구들 중에도 ‘보상금 얼마 받았냐?’고 묻고… 304명이 죽었어요. 이건 그 죽음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보상금에 대해서 관심 가지는 사람들 보면 마음이 많이 상하시죠.

“그동안 배·보상 받은 것 없고요. 많은 유가족들은 배·보상 거부하고 따로 민사소송 진행중입니다.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동안 선장과 선원에 대한 판결이 있었고 청해진해운 유병언도 죽었으니 이제 마무리 단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어요. 안개 꼈는데 왜 배가 출항했는지, 왜 국정원이 개입했는지, 청와대는 그날 뭘 했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국정원은 청문회에 나오지도 않았어요. 3차 청문회가 열릴 수 있게, 특별조사위원회가 연장될 수 있게, 특별법이 개정될 수 있게 시민들이 꼭 함께해주시면 좋겠어요.”

20대 총선을 앞두고 4·16연대는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반대하거나 막말로 피해자 가족을 모욕한 18명의 후보자를 낙선운동 대상자로 지정해 발표했다. 이 중에서 낙선한 사람은 7명. 나머지 11명은 금배지를 달았다.

-보나씨 페이스북에 ‘오늘 첫 투표를 했어야 할 아이들과 모든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꼭 투표에 참여하자고 글 올린 걸 봤어요. 총선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월호에 대해서 이상하게 말한 심재철 의원이나 김진태 의원, 나경원 의원 모두 당선이 되었잖아요.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정치인이 될 수 있는지 실망스러워요. 그래도 여소야대가 된 걸 보면 사람들이 많이 답답해했구나 싶고요.”

-지난 2주기 추모행사 때 비바람 치는 날씨에도 시민들이 많이 모였더라고요. 그날 광화문광장에 오셨어요?

“1주기 때까지만 해도 형제자매가 전면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 부모님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부모님들도 많은 상처를 받으셨는데 자식들까지 다칠까봐. 근데 올해엔 같이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모님 대에 안 끝나면 너희 세대가 꼭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주 오래가는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시는군요.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들을 하시는 것 같아요. 사실 저희 형제자매들도 많이 지쳐 있었어요. 근데 폭우가 쏟아지는데 집에 가지 않고 시민들이 끝까지 함께 계셨잖아요. 우리와 함께 비를 맞아주셨거든요. 시민들이 기억하고 함께해주는데 포기하지 않고 해야겠구나 다짐하고 힘도 얻는 시간이었어요.”

-20대 국회 당선인 중에 111명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세부 실천과제에 대해서 찬성하고 약속했잖아요. 근데 정작 2주기 추모행사에 김종인 대표나 안철수 대표는 당의 공식적인 차원에선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많은 시민들이 여소야대가 되었으니 잘되겠지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희 가족들은 그동안 봐온 게 있어서 여든 야든 안 믿어요. 박주민 변호사님처럼 세월호와 함께하는 분들이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당에서 알아서 다 해결해줄 거라고 믿긴 어려워요.”

세월호를 ‘잘’ 기억하는 법

-세월호 희생자 성호 누나로서가 아니라, 스물두 살 여성 박보나로 이제 자기 앞날도 고민해야 하잖아요.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 생각이세요?

“이 사건을 겪고 나서 어른들이 말하는 성공의 의미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요. 돈 잘 벌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저는 돈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거든요.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서보다는, 성호가 생각했던 대로 남을 도우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사실 지금 부모님들도 직장을 그만두셨고 어머니도 편찮으시고, 제가 장녀로서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고민이 많이 돼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세요?

“작년 내내 부모님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아파도 병원에 안 가셨어요. 저희 어머니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특별법 때문에 단식하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몸이 이미 안 좋은 상태였거든요. 근데 ‘내가 지금 병원에 있을 때냐?’고 하면서 자기 몸 안 돌보고 뛰어다니신 거죠. 부모님들 대부분이 그러세요. 자식한테 부끄럽지 않게,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면서. 올해는 그게 한계에 달해서, 병원에 가면 부모님들 다 마주치게 되더라고요.”

-성호가 2년 전 자신한테 편지를 썼잖아요. 보나씨한테 2년 후의 자신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한다면 뭐라고 쓰겠어요?

“(한참 생각) 그때까지 내가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건 나고 4년째가 될 테니 사람들도 세월호 얘기를 지금보다 덜 하게 되겠지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진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길 바래요.”

-참사가 나고 많은 시민들이 ‘잊지 않겠습니다’ 다짐을 했어요. 근데 수시로 문득문득 마음이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어떻게 세월호를 기억해야 할까요?

“작년 2월에 세월호 형제자매 4명이 목사님과 일본에 평화기행을 다녀온 적 있어요. 나가사키 원폭기념관을 갔는데, 국가에서 만든 기념관과 나가이 다카시 박사라는 분이 만든 사설기념관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이 달라요. 국가기념관에선 ‘우리가 힘이 없으면 이렇게 당한다, 힘을 길러야 한다’는 거였는데, 원폭으로 부인을 잃은 유가족이자 생존자인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기념관엔 ‘전쟁을 하면 왜 안 되는지 봐라, 원폭의 참상을 기억하자’고 해요. 세월호도 그런 것 같아요. 그냥 기억하는 게 아니라 세월호의 의미를 ‘잘’ 기억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는 게 잘 기억하는 거죠?

“이건 과적으로 인한 사고가 아니에요. 우리 사회의 적폐가 누적되어서 생긴 학살이에요. 이건 교통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봅니다.”

인터뷰 내내 박보나는 담담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언성을 높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박보나는 불쌍하고 가엾은 희생자가 아니라 태만하고 안일한 우리를 대신해서 앞장서 싸우는 파수꾼이다. 그를 향해 연민의 눈물을 흘릴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장 28절)

녹취 김성희

이진순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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