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여소야대 출현, '87년 체제' 지각변동의 시작일까
허 대표뿐 아니다. 대부분은 이번 20대 총선 결과를 야권분열로 야권 필패-여권 과반을 예상했다. 예측은 틀렸다. 반대였다. “이번 선거가 갖는 가장 큰 의미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상적 선거과정을 통해 집권보수당의 과반이 무너지고 동시에 1당 지위까지 상실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정치학) 교수의 말이다. 1987년 이후 총선에서 ‘영남 보수 기반 정당’의 과반이 무너진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2004년 17대 총선 때다. 박 교수는 “그때 치러진 선거는 탄핵이라는 특수한 비상상황에서 탄핵 주도세력에 대한 정치적 응징이라는 성격을 가졌다는 점에서 예외”라고 말했다. “이번 결과를 놓고 보면 정상적인 선거과정에서 궤멸 수준의 응징을 당했다는 것이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다. 심지어 그 결과를 보면 1987년 이후 치러진 최초의 선거인 이듬해 4·26 총선 당시 여당(민정당)이 받았던 125석보다 더 적다. 더구나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 이런 궤멸은 처음이다.”
박 교수의 말을 듣다 보면 먼저 알아야 할 전제가 있다. 1987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틀이 만들어진 것이 1987년이다. 흔히 ‘87년 체제’라고 불린다. 국민 직접선거에 의한 5년 단임 대통령제-소선구제 승자독식, 단순대표제를 특징으로 하는 ‘87년 체제’는 87년 6월 민주항쟁 후 그해 11월 헌법 개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전에는 간접선거 방식의 7년 단임제와 중선거구제도였다. 중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두 사람을 뽑는다. 출마자는 기를 쓰고 1등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전국구 의원은 지역구 선거 결과 1당을 차지한 정당에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몰아주는 형태로 뽑았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얻은 신군부세력이 집권여당을 거의 반영구적인 다수당으로 만들기 위한 꼼수였다. 국민적 항쟁으로 그것이 거부되고 대신 만들어진 것이 ‘87년 체제’다.
정초(定礎)선거란 한 사회의 이후 정치지형을 확정짓는 선거를 말한다. ‘87년 체제’의 정초선거는 이듬해인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이었다. 87년 12월 대선에서 당시 야권은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신군부세력 정당인 민정당은 ‘87년 체제’ 이후에도 집권당으로 살아남았다. 13대 총선 당시 민정당이 차지한 의석은 125석. 전체 의석의 30%에 불과했지만 1여3야의 여소야대 속 다수당이었다. 야 3당은 지역을 나눠가졌다. 김대중(DJ)의 평화민주당은 호남을,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은 부산·영남을, 김종필(JP)의 공화당은 충청권을 중심으로 군웅할거하는 모양새였다.
현재 한국의 정치구조는 1990년 만들어졌다. 이른바 3당 합당이다. DJ의 평화민주당을 제외하고 YS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민정당과 인위적으로 합당해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여당을 만든 것이다. 지역을 매개로 ‘민주파’를 흡수했다. 대표적인 야당도시 부산은 YS의 변신에 따라 보수의 도시가 됐다. 서울 강남3구의 보수화도 그때 이뤄졌다.
박 교수는 인위적인 정계개편인 1990년 3당 합당의 ‘정치적 효과’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으로 1차 붕괴했지만, 이번 선거 결과는 정당체제에서 균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호남의 도움 없이 민주파 개혁정당이 1당을 차지한 것, 부산·경남(PK)과 대구·경북(TK)에서 의석을 배출한 것, 울산에서 노동후보가 당선한 것 등은 1990년 이전의 ‘역3당 합당’ 구도로 돌아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제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일까.
다시 처음의 ‘예측’으로 돌아가보자. “야권의 분열로 여권이 과반수를 넘어 3분의 2 개헌선까지 의석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새누리당 반대성향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협박 또는 위기의식 고취에 불과했던 것일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종 투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고 여론조사가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여론조사는 조사가 진행된 기간의 추이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순간의 단면을 드러내는 일종의 스냅샷이다.
다시 이번 선거를 복기해보자. 선거 2주 전, <주간경향>은 ‘깜깜이 선거’의 문제를 표지기사로 다뤘다. 선거를 45일 앞두고서야 선거구가 획정됐다. 지역구에 출마할 여야 각 정당의 후보 경선 일정도 줄줄이 늦어졌다. 공식적인 선거운동 기간은 13일에 불과했다. 자신의 지역구에 누가 나오는지 모르는 것은 유권자 잘못이 아니다. 몇 명의 후보를 두고 전국적 투표로 승부가 가려지는 대선과 달리, 87년 체제의 산물인 소선구제 아래 치러지는 총선은 253개의 지역구와 47명의 비례대표를 두고 벌어지는 승자독식 게임이다. 선거 막판까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경합지가 80여곳이 넘었다. 개표 결과 더민주는 출구조사 예상치의 최대치를 얻었고, 새누리당은 최소치를 얻었다.
총선 다음날, 프레스센터에서 ‘다른 백년’이라는 단체의 주최로 이번 총선 결과를 평가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더불어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123석을 얻은 것과 관련해 토론회에 참석한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일종의 사고가 난 것”이라고 말했다. “당 대표가 107석이 목표라고 했다. 기대하지 않게 1당이 된 것이다. 정당투표율만 보면 79석짜리 정당인데, 44석이 오버한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정당정치의 측면에서 이번 선거를 평가해 본다면 엄청나게 많은 문제를 드러낸 선거”라고 말했다.
‘깜깜이 선거’이다 보니 유권자 입장에서는 후보자의 공약이나 주장, 정책을 검증할 수 있는 지표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선택 기준은 소속정당이 될 수밖에 없다. 선거가 이렇게 치러지다 보니 출마후보는 당 공천에 목을 맬 수밖에 없게 된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부 교수(한국정치학회 회장)의 말이다. “듣기 거북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지난해부터 각 정당에서 공천 관련 세미나를 할 때마다 한 말이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하는데, 누가 돌려달라고 했나. 정당은 제한된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하면, 그 가치나 이념을 가장 잘 구현한 사람을 후보자로 내세우는 것이 원론적인 의미의 공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제부터인지 왜곡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꼼수’로 등장하는 것이 여론조사다.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하는 것은 지구당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현역은 의원사무실에서 당 활동을 하는 데 비해 경쟁자는 활동할 공간이 없어 회의를 커피숍을 전전하며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적으로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국회에 새로운 인물이 들어온다고 바뀌지 않는다”며 “실제 매 선거 때마다 50% 이상은 초선으로 교체되지만 그것을 통해 정치개혁이 이뤄졌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유권자의 어떤 선택이 이번 ‘이변’을 만들어냈는지는 앞으로 데이터에 근거해 보다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흔히 총선은 정당에 대한 심판을 하는 회고적 투표를, 대선은 후보자 인물을 중심으로 ‘미래’에 투표하는 전망투표를 한다는 가설은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큰 틀에서 맞는 것으로 보인다. 엄밀한 검증이 필요한 것은 스윙보터(swing voter)들, 즉 여에서 야로, 다시 야에서 여로 입장을 바꾸는 유권자들의 선택이다. 개개인의 투표성향과 상관없이 역대 선거 결과의 각 후보별 투표수 증감에서 스윙보터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찍었다가 2007년 이명박으로 갈아 탄 유권자는 651만명이다. 반면 2007년 이명박을 찍었다가 다시 2012년 대선 때 문재인으로 선회한 유권자는 485만명이다. (<주간경향> 1143호, ‘유권자는 어떻게 진영을 배신하는가’ 기사 참조) 비교적 구도가 명확한 대선에 비해 총선은 훨씬 구도가 복잡한 다차방정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는 지역후보와 정당투표를 각각 다른 정당에 하는 교차투표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번 선거를 통해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결론을 내기는 성급하다. 이번 선거 결과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대거 이동한 결과로 벌어진 일종의 착시효과일 뿐이다.” 김장수 제3정치연구소 소장의 말이다. 유권자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중간유권자들의 쏠림을 반영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해 불가능한 주장은 아니다. 이번에 야권이 당선자를 낸 TK, PK 지역은 2014년 지방선거나 2012년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했을 뿐, 당선에 근접한 결과를 냈던 곳이다. 박근혜 정부의 거듭된 실정에 더 많은 중간층이 이동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김 소장은 “핵심은 이들 중간층의 이동이 더민주를 지지해서 이동한 것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계속된 실정에 실망해 일종의 도구로 야권에 대한 투표를 이용했다는 점”이라며 “과거 노무현 정부 말기에 진보정권에 실망한 사람들이 이명박으로 이동했던 것처럼, 보수정권 8년에 실망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선택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국민의당에 대한 지지도 마찬가지다. 강원택 교수는 “제3당의 출현과 새로운 정치구도에 많은 유권자들이 일정 정도 기대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존에 지지해 왔던 정당에 대한 실망감이 더 큰 규정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보수정당이 이렇게 혁신을 하지 않고 선거를 치르는 것은 처음 봤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의 말이다. 그는 “현재의 새누리당은 3당 합당 이래로 당명을 바꿔 왔지만 TK 중심의 보수성과 부산 민주계 중심의 개혁성이 충돌하며 긴장관계를 보여 왔고, 그것이 혁신의 동력이었던 정당”이라며 “보통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혁신을 세게 하고 전열을 정비해 왔는데, 이번에는 믿기지 않도록 아무런 혁신 없이 넘어갔다”고 덧붙였다. 결국 혁신이 없었기 때문에 새누리당이 대패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3당 합당 후 한국 정치의 기본지형은 현재의 새누리 대 반새누리로 형성되어 왔는데, 이번 선거 결과는 그 구도를 일정 정도 깬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한마디로 말하면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대한민국을 이끌어 왔던 발전국가 모델은 시효를 다했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선거만 치르면 레임덕은 불가피하다. 게다가 이번처럼 여소야대 국면이 만들어지면 대통령의 남은 집권 후반기는 식물상태에 가깝다. 이건 국민으로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앞의 토론회에 참석한 박형준 국회 사무처장의 말이다. 그는 MB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을 역임했다.
한계에 봉착한 87년 체제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당시에 주목했던 것은 2012년이었다. 총선과 대선이 한 해에 치러지기 때문에 이 해에 치러지는 선거는 이후 열릴 새로운 체제, 2013년 체제를 규정하는 정초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통령 중임제나 내각제 개헌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논의는 더 이상 전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 결과는 새로운 체제, 이를테면 2017년 대선 후 ‘2018년 체제’로 나가는 대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박성민 대표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달성할 목표로 세 가지가 있다. 87년 직선제 개헌을 얻은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다양한 이해관계에 대한 갈등관리, 세 번째는 선출된 권력이 비선출된 권력을 통제하는 선거제도의 개편”이라며 “87년 개헌 후 88년 선거구제가 바뀌어 지금 체제가 만들어졌는데, 개혁은 선거구제 변경으로부터 시작해 개헌으로 나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복경 교수는 “과거 30년된 87년 체제의 문제점이나 한계에 대한 대체 논의가 없지 않았지만 뒤늦게 선거를 앞두고 정치개혁특위 등에서 소소한 논의만 한 것이 패착”이라며 “20대 국회가 출범하면 가급적 일찍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결선투표제 도입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 그것만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결선투표제만 도입해도 현재의 정치지형이나 정당 간, 후보 간의 연대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박상훈 소장은 “선거 결과가 예상했던 것과 달라진 것에 대해 일희일비하면서 선거가 끝난 뒤 사후적으로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정치의 문제가 무엇이고,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천착해 그것을 제대로 바꿔내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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