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김광석은 왜 추억의 현재진행형인가

2016. 4. 1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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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지난 1일부터 서울 종로구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김광석 20주기 추모전 ‘김광석을 보다展; 만나다·듣다·그리다’가 열리고 있다. 오는 6월 26일까지 3달에 가까운 일정이다. 여기에 맞춰 후배 가수들은 고인의 노래를 리메이크해 발표할 예정이다.

그가 태어난 대구는 2010년 방천시장 옆에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을 조성해놓고 그를 그리워하고 기리는 팬들의 발걸음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1964년 1월 22일 태어나 1996년 1월 6일 32살의 한창 때 세상을 떠난 이 뮤지션은 왜 유독 수많은 사람들의 감수성을 들쑤셔놓는 스테디셀러 가수가 됐을까?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 창신초등학교를 거쳐 경희중학교에 들어가 현악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대광고등학교에선 합창부에서 활동했다.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해 소극장 무대에 올라 민중가요 등을 부르며 가수의 꿈을 키우던 그는 1984년 12월 진보 노래집단 노래를찾는사람들(노찾사) 1집에 참여한다.

이듬해 1월 입대했지만 큰형이 사망함에 따라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바뀌어 6개월 만에 복학해 노찾사에 합류했다가 1987년 김민기 등과 함께 포크록 그룹 동물원을 결성해 1집과 2집에서 활동한다.

1989년 10월 김광석은 동물원에서 탈퇴해 솔로 데뷔음반을 내놓는다. 1991년 2집, 1992년 3집, 1994년에 마지막 정규 음반 4집을 발표했다. 1993년과 1995년엔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 부르기’ 1, 2집을 각각 내놓았다.

모든 가수들이 TV를 가장 중요한 활동장소이자 최고의 홍보 매체로 삼지만 그는 달랐다. 1991년부터 꾸준히 대학로 학전 등의 소극장에서 라이브를 하는 것에 집중해 1995년 8월 1000회 공연의 기록을 세운 데서 보듯 좁은 공간이지만 자신의 음악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애호가들과 먼지를 나눠 마시며 노래를 불러왔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분류됐었다. 필자가 여러 번 만났던 고인은 숫기가 없고, 수줍음이 많으며, 말수가 그리 많지 않은, 한 마디로 연예인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음악인이었다. 총각 시절 그가 팬 출신의 연인 서모 씨를 만나고, 결혼을 결심했을 때 필자가 둘을 불러내 인터뷰를 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 같은 언더그라운드의 가수의 결혼이 뭔 특종이나 되냐며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했을 정도다.

만약 비슷한 지명도의 다른 가수였다면 일부러 기사화해서라도 자신을 홍보하려 했을 텐데 그는 정반대였다. 김광석처럼 시나위라는 헤비메틀 밴드의 보컬리스트로서 주로 무대 위에서 팬들과 만나며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솔로로 데뷔해 ‘대답 없는 너’로 뒤늦게 제도권의 스타덤에 오른 김종서는 유명해진 지 한참 뒤 유부남이었음이 알려져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한 기자가 “결혼한 걸 왜 말 안 했냐”고 우문을 던지자 그는 “물어봐야 알려주지”라는 현답을 내놓은 바 있다. 김광석이 자신의 결혼 사실이 보도되는 것을 쑥스러워한 것처럼 무명시절의 김종서의 결혼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생전의 김광석의 포지션을 쉽게 표현하자면 포크계의 들국화였다. TV 쇼 관계자는 그를 외면했지만 공연장에서 TV와는 달리 눈과 귀 외에도 피부와 폐부로 느낄 수 있는 음악을 선호하는 진정한 음악 마니아들은 그의 공연장을 일부러 찾아다닐 정도로 열광했다. 그런 열렬한 지지가 없었다면 1000회 공연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연제작자나 공연장 사장은 자선사업가나 문화의 전도사가 아니다.

사망 전에도 이미 그의 진가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TV 음악프로그램 관계자나 그런 프로그램으로 가요를 접하는 대중만 몰랐을 따름이다.

그런 그의 상업적 가치관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값어치가 의문사 이후 서서히 입에서 입으로, 또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지다가 결정적으로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한 계기는 2000년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수혁(이병현) 병장이 북한군 초소에서 탈출해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아군 진영으로 달려오는 비장한 장면에서 높은 데시벨로 웅장하게 울려 퍼진 노래가 바로 ‘이등병의 편지’였다. 그 전까지 대중은 군대 관련 가요라면 ‘입영전야’와 ‘입영열차 안에서’가 전부인 줄 알고 있었지만 이 노래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김광석이 생전에 발표했던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평가받기 시작했고, 스테디셀러가 됐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사랑했지만’ ‘거리에서’ ‘말하지 못한 내 사랑’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그대의 웃음소리’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변해가네’ ‘나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 ‘먼지가 되어’ 등은 지적인 고독의 대명사 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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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먼지가 되어’(이윤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번안해 ‘역’이란 제목으로 양병집이 부른 곡) 등은 엄연히 다른 포크계열의 오리지널 가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광석 버전이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음악감독 조영욱은 원래 서울음반의 핵심인 기획팀 직원이었다. 당연히 동물원의 음반발표에 관여했고, 김광석의 음악성을 눈여겨봤을 터. 그가 ‘이등병의 편지’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왜 김광석의 노래는 이 첨단 디지털 시대에 재조명되는 것일까? 왜 이토록 오랫동안 꾸준히 큰사랑을 받는 것일까?

먼저 그의 목소리다. 약간의 탁성과 미성이 섞인 이 유니크한 오묘한 음성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오리지널리티를 간직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 톤은 사람들의 지적인 정서와 더불어 슬프거나 아픈 추억을 건드리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양병집이 비슷한 스타일이고, 이윤수는 매우 매끄러운 보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김광석이 확 튀는 이유다.

물론 김광석은 풍부한 성량과 안정된 호흡을 자랑한다. 타고난 능력과 더불어 수많은 라이브 경험이 만든 실력이 더해져 완성된 것이다.

아무래도 대중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사다. 그래서 사랑타령이 많은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도 역시 사랑 얘기가 눈에 띄지만 다수의 노래는 철학적이며 인생을 논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더불어 다수의 공감을 자아낼 만큼 생활밀착형이면서도 매우 현학적이다.

2007년 평론가들에게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된 ‘서른 즈음에’ 한 곡만으로도 그의 작품 속의 철학과 인생관을 읽을 수 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여기서 ‘내 사랑’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다. 그건 애인이 포함될 수 있지만 가족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뜻하는 동시에 희망 성취감 의욕 원기 건강 등 인생의 모든 것을 뜻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꾸 초라해지는 자신과 자신의 인생, 즉 우리 모두의 인생을 자조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1994년에 발표된 이 노래의 가사의 결코 고색창연하지 않고 매우 현실적으로 피부 깊숙이 와 닿기에 지금 더 빛을 보는 것이다.

그의 노래들의 멜로디는 결코 자극적이지 않다. 편곡은 화려하지 않다. 그는 무대 위에서 밴드도 없이 직접 통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 따름이었다. 다만 포크 혹은 클래식 등의 고전적 작곡기법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정도를 지키는 가운데 각 프레이즈와 그것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곡으로 완성됐을 때의 멜로디와 전체의 조화에 집중한다. 그건 깊고 오래된 음악적 고뇌에서 우러나온 가사와 멜로디의 절묘한 조화와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진정성 있게 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 잘 아는 김광석만의 해석이 완성한다.

그의 음악은 한국적 포크록에서 기인한다. 10대 때 한대수, 양병집, 밥 딜런, 닐 영 등을 듣고 자란 그는 자연스레 현실의 아픔을 대변하는 한편 어둠 속에서 마음이나마 아름다운 동화를 꿈꿀 수 있게끔 도와주는 노래를 부르는 데 자신도 모르게 젖어들었고 그건 포크나 록이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져갔다.

밥 딜런이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들쳐 메고 무대 위에 올랐을 때 포크 마니아들은 크게 비난한 바 있다. 하지만 김광석은 끝까지 통기타를 지켰다. 그만큼 그는 순결한 뮤지션이었다.

포크는 자유와 변화를 찾아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온 미국 사람들이 클래식과 인디언들의 전통가요 블루그래스를 합해 만든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이다. 포스터의 ‘오, 수재너’가 유명하다. 그 정서를 이어받은 컨트리앤드웨스턴이 나오고, 이게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만든 블루스와 만나 록이 탄생된다. 포크에 록의 강렬한 비트와 저항정신을 담은 게 바로 포크록이다. 인본주의 자연주의에 철저한 비폭력 반전의 정신이 담겨있는 음악이다.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등의 록뮤지션들이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성 콘서트를 열어 미국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듯, 1970년대 김민기 등의 포크 뮤지션들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게 핍박받았지만 청바지를 입고 생맥주를 마시는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은 바 있다. 김광석은 그 후예다.

최근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이나 로이킴의 ‘봄 봄 봄’에 비교해보면 김광석의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20년이 지난 노래가 지금 들어도 세련됐다. 아니 마치 아름다운 클래식 소품 하나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김광석의 노래들은 거의 작곡의 교과서다. 그 철저한 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감동의 멜로디와 형식을 완성하는 그의 노래가 싫증 없이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기초가 거기에 있다. 김광석은 절대 외모를 꾸미려 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도 그렇다.

그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요절한 선배 뮤지션으로 김현식, 더 거슬러 올라가 김정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김광석이 스테디셀러인 이유는 보편타당성과 대중성에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남한 병사들과 우정을 나누던 북한군 오경필(송강호) 중사는 이수혁에게 “그런데 왜 김광석이는 그렇게 빨리 갔니?”라고 묻는다. 수백, 아니 수천만 명의 팬들이 묻고 싶은 말이다./osenstar@osen.co.kr

<사진> 김광석 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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