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먹을거리 없소?' 높다란 '예능 보릿고개'

조아름 2016. 4. 1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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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쿡방 가요 예능 등 트렌드만 좇아 식상

“특별히 맛있게 먹은 것도 아닌데 먹다 보니 배는 꽉 찬 그런 느낌이에요.”

대학생 김석진(27)씨는 최근 방송 중인 TV 예능프로그램을 이렇게 평가했다. ‘무한도전’(MBC), ‘런닝맨’(SBS) 등 주말은 물론 평일 늦은 밤 방송까지 예능프로그램 대부분을 챙겨본다는 김씨는 “얼마 전까지 틀기만 하면 ‘쿡방’(요리하는 방송)이더니 이제는 노래예능만 나오더라”며 “프로그램은 쏟아지는데 딱히 볼 만한 건 없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예능을 사랑하는 시청자들이 피로감에 젖어가고 있다. 수 년째 반복돼 온 식상한 포맷에 복제한 듯 똑 닮은 내용으로 우후죽순 생겨나는 프로그램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저조한 시청률이 뒤따른다. 바야흐로 볼 건 많은데 볼만 한 프로그램은 없는 ‘예능 보릿고개’ 시대다.

도 넘은 자기복제, 식상함의 끝

지난 1일 4.1%란 저조한 시청률로 끝난 tvN ‘꽃보다 청춘-아프리카’. tvN 제공

지난 1일 막을 내린 tvN 여행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청춘-아프리카’편 최종회 시청률은 4.1%(닐슨코리아 기준). 시즌제 예능 ‘꽃보다’ 시리즈로 한때 1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이끌어냈던 나영석 PD로서는 자존심이 구겨졌을 만도 했다.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박보검, 류준열, 안재홍, 고경표 등 요즘 방송가에서 가장 눈길을 모으고 있는 배우들이 출연하고도 이 프로그램이 고전을 면치 못 했던 이유는 뭘까?

시청자들은 ‘식상했다’고 입을 모은다. ‘꽃보다’ 시리즈는 첫 전파를 탔던 3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던 ‘할배’와 ‘누나’를 앞세워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해외여행-고생 길-위기 극복’이란 매번 반복되는 패턴이 지루하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수 년째 똑같은 포맷으로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는 건 지상파도 다르지 않다. ‘무한도전’(MBC)과 ‘슈퍼맨이 돌아왔다’(KBS), ‘런닝맨’(SBS) 등 3사의 간판 예능프로그램들은 최근 2~3년 사이 시청률이 하나같이 반 토막 났다. ‘무한도전’과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10%대를 유지하며 간신히 지상파 예능의 자존심을 유지하는 중이지만 ‘런닝맨’은 200회(2014년)를 전후로 이미 한 자리 수 시청률을 전전하고 있다.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위)와 '쿡가대표'. 국내와 해외란 배경만 달라졌을 뿐 출연자는 동일하다. JTBC 제공

더 노골적인 자기복제로 식상함의 끝이란 혹평을 받는 방송도 있다. 지난 2월 첫 방송된 JTBC ‘쿡가대표’는 ‘냉장고를 부탁해’의 배경만 국내 스튜디오에서 해외 주방으로 옮겨놨을 뿐 요리 대결이란 포맷은 똑같다. ‘냉장고를 부탁해’의 MC인 김성주, 안정환은 물론이고 최현석, 오세득, 이연복 등 스타 셰프들도 그대로 출연한다. ‘비정상회담’의 스핀오프(Spin offㆍ기존 작품에서 파생된 작품) 격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도 마찬가지다. MC 유세윤을 포함해 기욤 패트리, 타일러 라쉬 등 ‘비정상회담’ 외국인 출연자들이 그대로 나오고 ‘꽃보다’ 시리즈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준다.

‘냉장고를 부탁해’와 ‘쿡가대표’를 제작한 이동희 JTBC 책임프로듀서(CP)는 “부록 같은 선물로 생각해 달라”며 자기 복제란 비판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쿡가대표’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해도 해도 너무한 겹치기 출연” “식상함의 끝판왕”이란 혹평과 함께 1~2%대의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 들고 있다.

쿡방의 후예? 쌍둥이 음악 예능 봇물

방송사 사이 도 넘은 ‘예능 따라하기’도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일단 반응이 좋으면 다른 방송사들도 출연자만 바꿔 거의 똑같은 프로그램을 우후죽순 만들어 내기 바쁘다. ‘짝퉁’ 이라는 오명도 개의치 않는다. 방송사로선 시청률이 높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와 오디션 프로그램이 범람하던 2000년대 중반까지 올라갈 것도 없다. 지난 2년 간 방송가는 남자 연예인들이 주축이 된 ‘육아 예능’과 ‘쿡방’으로 넘쳐났다. MBC ‘아빠, 어디가!’(2013)가 성공하자 KBS와 SBS는 기다렸다는 듯 ‘슈퍼맨이 돌아왔다’ ‘오! 마이 베이비’를 각각 ‘출시’했다. 따라하기 비판에도 두 방송사는 “장르적 성격만 비슷할 뿐 출연하는 아이들의 연령대와 프로그램 구성이 엄연히 다르다”는 군색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요리연구가 백종원과 일부 스타 셰프들이 불을 지핀 쿡방 열풍은 또 어떤가. 지난 1년 동안 시청자들은 그야말로 쿡방의 홍수 속에서 헤엄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MBC ‘마이리틀텔레비전’(마리텔)에서 시작된 백주부의 인기에 ‘냉장고를 부탁해’(JTBC) ‘집밥 백선생’(tvN) ‘백종원의 3대천왕’(SBS)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올리브TV) 등 지상파와 종합편성(종편), 케이블채널을 가리지 않고 쿡방 프로그램들이 범람했다. 유명 셰프끼리의 대결 혹은 연예인이나 평범한 사람들끼리의 요리대결로 구성만 조금씩 변주했을 뿐이다.

SBS ‘보컬전쟁-신의 목소리’(맨 위부터), MBC ‘듀엣가요제’, SBS ‘판타스틱 듀오-내 손안의 가수’. 각 방송사 제공

기세 등등하던 쿡방의 힘이 예전만 못하자 최근 방송사들은 하나같이 음악 예능을 들고 나왔다. ‘보컬 전쟁-신의 목소리’(SBS) ‘듀엣 가요제’(MBC) ‘판타스틱 듀오-내 손 안의 가수’(SBS) 등 지난 한 달 동안 지상파에서 신규 편성된 음악 예능만 3개다. 여기에 ‘힙합의 민족’(JTBC) 등 종편ㆍ케이블 프로그램까지 합하면 방송 중인 음악예능의 규모는 더 커진다.

음악 예능인 MBC ‘복면가왕’이 15%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자 지난 설 연휴 파일럿 프로그램(시험 삼아 제작 방송하는 프로그램)으로 선보였던 음악 예능을 동시에 풀어놓은 것이다. ‘판타스틱 듀오’는 ‘복면가왕’과 같은 시간대 맞붙는다.

세 프로그램 모두 프로 가수와 숨은 노래실력을 자랑하는 일반인들이 무대를 꾸민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여기에 성시경은 ‘신의 목소리’와 ‘듀엣가요제’에 동시에 MC를 맡았다. 시청자들의 피로감은 상승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판타스틱 듀오’ 김영욱 PD는 “(다른 음악예능과 달리) 가수 지망생이 아닌 정말 평범한 시청자들이 참여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며 애써 차별점을 찾으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지상파 예능국의 한 관계자는 “동시에 쏟아져 나온 탓에 프로그램 이름도 구분이 안 갈 정도”라며 음악 예능의 미래를 어둡게 예상했다.

시청률 강박이 부른 빈약한 콘텐츠

제작 현장에선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도전을 허하지 않는 제작 분위기 탓에 기발한 아이템은 사치가 된 지 오래”라는 항변이 쏟아진다. 채널 다양화로 시청률 경쟁 역시 전보다 치열해진 상황에서 트렌드를 반영한 프로그램 제작이 그나마 안전한 방법이라는 거다.

경력 10년의 한 지상파 PD는 “바통을 넘길 만 한 다음 주자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새로운 프로그램 기획을 위해 재충전을 하고 싶어도 부족한 인력 상황 속에서 이는 언감생심이다. ‘육아예능’이든 ‘쿡방’이든 급한 대로 현재 불고 있는 열풍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상파에도 시즌제 예능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이승한 대중문화평론가는 “누구나 시간에 쫓기면 결국 기존에 봤던 것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자유롭고 여유로운 제작 분위기가 방송 콘텐츠의 질을 결정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시청률 강박이 자극적인 설정과 편집을 부른다는 지적도 크다. 지난 2월 설 특집으로 방송된 KBS2 ‘본분 금메달’이 대표적이다. 이 프로그램은 철봉에 매달린 여성 아이돌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주거나 영하의 날씨에 섹시 댄스를 추게 한 뒤 체중계로 몸무게를 측정하는 등 무리한 설정과 가학적 묘사로 방송 이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법정제재를 받기도 했다. 최근 한부모 가정 조롱, 아동 성추행 묘사 등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tvN ‘코미디 빅리그’ 역시 성희롱 발언과 여성 외모 비하로 수 년째 논란의 중심에 있다.

결국 현재의 총체적 위기를 초래한 방송사 스스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방송사가 유행만 좇다 보니 시청자가 식상함을 느끼는 주기도 그만큼 빨라진 것”이라며 “MBC ‘마리텔’처럼 대중문화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색다른 포맷의 프로그램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기존의 파일럿 제도를 최대한 활용해 참신한 시도를 끊임 없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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